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동적 직장인 Oct 30. 2019

아이고, 봄

새내기때는 왜 맨날 취해있었을까

 더럽게 재미없는 수업이다. 기계설비와 계획 설계 얘기만 2시간째. 교수는 과제 똑바로 하란 얘기를 끔찍하게도 떠들고 있다. 약속 있는데 대체 언제 끝난담. 옆 강의실은 일찍 끝났는지 복도에선 한 무리가 떠들며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지루함에 눈알만 굴리다 창밖을 보니 날씨는 또 얼마나 좋은지. 벌써부터 꽃냄새가 나는 것 같다. 자리에 앉아있기엔 햇살이 너무 간지러운 걸 보니 아이고 또 봄이 왔나 보다.


 오늘은 전에 좋아했던 오빠와 점심을 먹었다. 때는 3월, 새내기 시절이다. 봄의 캠퍼스에는 누가 마약이라도 풀어놓은 듯 웃음소리에서도 단내음이 났다. 다들 어딘가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새로운 사람들을 스캔하느라 눈만 빠르게 움직였다. 하필 14년도 3월 멜론 차트 1위는 정기고의 ‘썸’이어서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같은 너”를 반복하다 보면 지긋한 공부로 굳었던 심장도 괜히 두근거렸다. 밖엔 꽃도 안 폈는데 이미 원피스에는 만개해 그려져 있었고, 춥지도 않은지 여자애들은 살색 스타킹만을 고집했다. 남자애들도 봄이라고 청남방에 검은 슬랙스를 입고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3시 방향 귀요미니, 11시 방향 개쩐다는 말 따위를 주고받았다. 반짝이는 흰 운동화와 어깨 뽕 들어간 코트는 1학년 남자애들의 시그니쳐였고, 수능 후 호기로 한 촌스러운 파마머리를 처치하지 못하긴 남녀 할 것 없이 똑같았다. 그러나 그 역시도 새내기의 상징이려니 하고 다들 귀여워했다.


 풋풋한 동기들에 비해 선배들은 과하지 않은 남친룩을 구사할 줄 알았다. 그 때문에 두어 살 많은 이들을 만날 때는 평소보다 심장이 2배쯤 빠르게 뛰곤 했다. 일명 선배 버프. 나 역시 그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한 가지 다행이었던 점은 금사빠는 나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친구들을 만나면 다들 잘생긴 선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고, 대학에 가지 못한 애들은 재수학원의 남자애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았다. 아닌 척 ‘이상한 애가 자기 반에 있다’는 식으로 말만 해도 다들 속으론 내 친구가 그와 사랑에 빠질 것을 예감했다. 어찌 됐든 나도 단내음에 취했고 한 달에 12명쯤에게 사랑에 빠졌다가 정신을 차렸다가를 반복했다. 이 오빠도 그 12명, 원탁의 기사 중 하나였다. 물론 그중에서도 랜슬롯 경이 그의 롤이었음을 내 친구들은 기억할 것이다. 주인공이었다는 말이다.

 그를 좋아하게 된 것은 단순한 이유였다. 잘생겼고 몸이 좋았고 목소리도 좋았다. 같이 다니는 또래보다 4-5살쯤 많아 그와 얘기할 때면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제일 좋았다. 누가 펌프를 밟고 있는 듯 마음은 부풀어 올랐고 펑하고 터질 때쯤엔 친구들에게 그에 대해 쫑알거렸다. 얼굴은 연예인 H와 B를 섞은 것 같고, 몸은 요즘 뜨는 T보다 좋다며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그걸 들은 친구 하나는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며, 무슨 상상의 동물이냐고, 유니콘이냐고 했다. 그때부터 우리 사이에서 오빠는 유니콘으로 불렸다. 하지만 내 현실엔 그 유니콘이 실재하고 있었고 그런 축복이 이 찬란한 스무 살에 온 것에 감사하기 바빴다. “아 신이시여”가 내 단골 멘트였다.


 그 시절엔 일주일에 이틀, 유니콘과 수업을 같이 듣는 날만 기다리곤 했다. 강의가 있는 월, 수는 너무 빨리 지나갔고 주말은 지겹도록 길었다. 1시간 반이 눈 깜짝할 새라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4시에 온다면 3시부터 난 행복해질 것’이란 시의 한 구절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남은 날은 무슨 핑계로 연락할지 고민하기에 너무 짧아서 결과적으로 내 3월은 봄이 어느새 오듯 그렇게 빠르게 지나갔다. 하루는 그와 수업을 같이 듣는 날이었다. 사실 별다른 이벤트는 없었다. 그냥 눈이 마주친 것이 가장 큰 사고였다. 멀리 있는 그가 나를 보고 있는 걸 발견한 후, 뭐가 묻었나 싶어 갸우뚱했다. 그러자 나를 따라 그도 갸우뚱했다. 그렇게 바보들처럼 갸우뚱거리기를 반복하다가 입 모양으로 물었다. “왜?” 오빠는 싱긋 웃으며 입모양으로 답했다. “그냥.”


 확 열이 올랐다. 진짜 그 얼굴에 그 어깨에 그렇게 웃기까지 하는 건 반칙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마주 웃고는 수업에 집중하는 듯 고개를 돌렸지만, 심장은 도무지 진정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편의점이 어쩌고 영화가 어쩌고 하는 교수님의 말은 그냥 bgm일 뿐이었다. 머릿속에서는 방금 전 장면만이 미친 듯이 반복 재생되기 시작했다. 지금 세상에서 이것보다 재밌는 영화 같은 건 없었다. 아무리 노력을 해봐도 올라가는 입꼬리는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고개를 책상에 처박고 맘껏 미소 짓고는 정색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붉어진 볼은 빔프로젝터를 이유로 낮춰둔 불이 가려줬다. 그때처럼 형광등에 고마웠던 적이 있었나 싶다. 늦은 햇살과 봄의 냄새와 뒤에서 졸고 있는 동기들마저 아름다웠다. 절절하게 접근하던 이들도 천진한 척 도도한 척 웃어넘기곤 했는데. 참 어이없게도 난 그 한마디에 넘어갔다. “그냥.”

 간만에 그 오빠를 보자 4학년답게 아주 능숙하게 하리라 생각했다. 이제 뭐 더 좋아하지도 않겠다, 나도 연애할 만큼 했고 누구 울려도 보고 다 해봤으니. 새내기 때와 다른 날 보여주겠어 하고. 떨려서 김치도 제대로 못 집어 먹던, 숟가락 달그락거리는 소리마저 어색했던 그 날들과는 다르게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를 보여줘야지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한 것이라곤 능숙하게 밥 먹는 일뿐이었다. 입을 꼭 다물고 아주 능숙하게 밥을 먹었다. 밥만 먹었다. 밥 맛있더라. 하 망했다.


March 14, 2018

매거진의 이전글 콤플렉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