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동적 직장인 Nov 02. 2019

유전자의 저주

왓츠인마이 블러드

 나에겐 한 가지 술버릇이 있다. 말 많던 아이가 술만 먹으면 꽤 얌전해진다는 것이다. 한 잔, 얼굴이 빨개지고 한 병, 말수가 적어지고 웃기만 한다. 한 병 반, 스르르 잠이 든다. 일행들이 두병쯤 마셨을 떄 잠에서 깨어나 아무도 모르게 나가서 택시 타고 집에 간다. 평소에는 tmi인 인간이 술만 들어가면 벙어리가 되는 이유는 뭘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사실, 나는 뭘 하든 쉽게 과해져 버리는 인간이다. 그래서 맘속에 늘 적당히 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사는데, 술을 마시면 그 생각이 점점 커져서 입을 다물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짐들이 그러하듯 이것은 종종 실패해버리고 만다. 본디 말이 많은 사람은 입을 주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도 나의 다짐은 마음 한구석에서 자꾸 고개를 들곤 해서 어쩔 수 없이 기지를 발휘하곤 했다. 해답은 뭔가 명분을 만드는 것이다. 마치 다이어트 중에 맥도널드를 지나갈 때처럼, 감자는 야채니까 괜찮지 않을까 합리화하고 감자튀김을 사 먹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누군갈 술자리에 부르라는 말이 나오거나 sns에 웃긴 게시물이라도 올라오면 득달같이 전화를 걸어 주절주절 못 뱉었던 말을 마구 한다. 뭐 대단한 속이야기도 아니고 그냥 말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기 때문에 아무 말이나 하고 대화를 이끌어 가버린다. 이런 언어에 대한 사랑은 어디에서 온 걸까 생각하다, 끝내 난 만고의 진리에 도달했다. 다 유전 때문이다. 외가에서 이 빌어먹을 모터가 내려온 것이 분명했다.

 사실, 어릴 적 나는 지긋하리만치 시끄러운 외가 일족들을 싫어했다. 그들은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친척들은 모두 지방에 살았기 때문에 우리는 일 년에 두 번, 명절 때뿐이 만나지 않았는데, 내게는 이마저도 진이 쭉 빠져버리는 행사였다. 10시간은 족히 달려 부산 큰집으로 가면 자정이 넘도록 시끄럽게 노는 집은 딱 한 채, 우리의 목적지, 큰 집뿐이었다. 그곳에선 흡사 개강 첫 주 학교 앞모습 같은 모습이 벌어지고 있었다. 더럽게 정신이 없었다. 외할아버지부터 막내인 내 동생까지 총 24명과 개 워리(혹은 월이/ 月이/ worry)까지, 오 남매와 그들이 뿌리내린 일가에는 조용한 사람이 어쩜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개 워리까지 곧잘 짖어대곤 했다. 애주가 12명(술을 마실 수 있는 어른은 12명이었다)은 술을 마실 밤이 오늘뿐인 사람들처럼 전국 팔도에서 안주를 싸들고 왔다. 다른 가족의 명절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모르긴 몰라도 이놈의 외가는 청주를 마시려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분명했다.


방어회에 전어구이, 문어숙회 그리고 육회까지 한 가족이 도착할 때마다 제철음식은 하나씩 늘어났고, 각 음식들마다 이야기도 한 보따리씩 풀어놓았다. 이를테면 ‘이게 어떻게 먹어야 맛있는지’부터 시작해서, ‘제철음식 잘하는 맛집 탐방기’, ‘같이 같던 사람이 결혼 전에 만났던 애인이냐-’까지. 나중엔 ‘애인 생기면 데리고 갈란다’라는 되지도 않는 농담에 이르렀다. 이야기가 길어질 때쯤, 큰 외삼촌과 둘째 외삼촌은 몰래 숨겨둔 값비싼 양주를 맞춰 꺼냈다. 양주를 한 병만 꺼내면 어른들은 ‘그거 누구 코에 붙이냐’면서 꼬불쳐 논거 하나 더 가져오라고 난리였다. 그러면 약속이라도 했듯 외삼촌들은 진짜로 뒤에 숨겨둔 양주를 하나 더 꺼냈고, 깔깔거리는 소리에 집안은 또 떠들썩해졌다. 그 사이에서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술친구를 만난 엄마는 진탕 취해버렸고, 술만 들어가면 벌게지는 아빠 역시 그날만큼은 밤이 새도록 고스톱을 쳐가며 술에 취해 떠들어댔다.

그 시끄러운 집에서 나는 조용하고 차분한 가정을 꿈꿨다. 나중에 시끄러운 사람이랑은 절대 만나지 말아야겠다 생각하며, 동시에 나는 동생이 하나뿐이니 나중에 설날에도 아주 조촐하겠거니 하고 미리 기뻐하기도 했다. 다들 취해서 흐물거리는 것을 보며, 커서 난 저러지 말아야지 했다.그러나 그 다짐과 바람들은 얇고 힘이 없었고, 유전자는 무엇보다도 강력했다. 제길, 나 역시 입에 모터를 단 인간으로 자라난 것이다. 어릴 적 다짐들은 다 글러먹었다. 피는 못 속이는지 말도 술도 좋아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평소보단 술 마실 때 조용하다는 것인데, 지난날 외갓집 명절의 여파 때문일지도 모른다. 너무 지긋했거든. 말은 많이 하고 술은 계속 먹는 이 가문의 딸로 자라나 이 정도만 한 것도 선방이라고 생각해야하는 걸까. 이 굴레를 벗어나는 법을 아신다면 dm 주시라. 쓸만하면 사례하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고, 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