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동적 직장인 Apr 30. 2020

이 망할 놈의 연애는 왜 항상 이 모양인가

23세까지의 요약정리본

1
A는 다짜고짜 얘기를 쏟아낸다. 딱히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당황할만한 일이었다. A가 누구인가. 맨날 영감님처럼 웃기나 하고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게 서핑밖에 없는 한량 아닌가. 종종 귀여운 양말을 신고와선 주절주절 자랑하는 동네 오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딱히 세상에 불만도 없고 생각도 없는 평화주의자. 그런 애가 흥분하면서 말을 하다니. 정신을 붙잡고 얘기를 듣자 하니 내용이 또 가관이다. 민주주의 얘기를 하고 있다 이 미친놈이. 언론의 자유가 어쩌고저쩌고 미래가 어쩌고저쩌고. 술도 맨날 궤짝으로 들이부으면서, 별로 취하지도 않으면서, 갑자기 왜 이러냐 얘. 근데 듣다 보니 내가 얘를 똑바로 알았던 게 맞았던가 싶다. 표정을 보니 눈빛이 꽤 진지하다. 보다 보니 좀 귀여운 거 같기도 하고. 사실 A가 생긴 건 봐줄 만하니까. 앞에서 주절거리는 이 인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가, 어느새 그의 목소리보다 반짝이는 눈과 투덜거리는 입술에 눈길이 간다. 음, 그래서 그냥 입을 맞췄다. 눈을 감는 순간, 그의 눈이 반달로 휘어지는 게 보인다. 아무래도 내가 해낸 것 같다.

그 날 이후, 가끔 갈색눈동자에 그의 알몸이 투명히 비춰 보이는 것 같았다. A가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은 상상해본 적도 없었는데. 키스보다, 그리고 섹스보다 그가 화나서 주절거리는 모습이 더 기억에 남는다니. 아마 그에겐 자존심 상하는 일일지 모른다. 지난날들을 생각해보니 자기 얘길하는 걸 본 적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뭐 하는 인간이지 대체. 누가 찔러도 허허 웃으며 넘길 것 같았던 사람이 사실은 속에 무얼 키우고 있는 걸까. 그 날의 A는 과연 누구였을까. 하지만 그는 평소대로 돌아와 세상 좋은 표정으로 웃고 있을 뿐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모양새를 쳐다보다, 저 몸을 찢고 싶단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주 좆됐네 라는, 그러니까 충분히 잘 알고 있는 그 과정을 겪겠다는 생각에 욕이 튀어나왔다. ‘이 망할 호기심이 나를 또 사랑으로 밀어 넣겠구나’

2.
샐쭉한 얼굴로 돌아온 그와 대화를 반복하고 있으면 저 안에 들어가고 싶단 생각을 했다. 동물잠옷을 입듯 단단한 갈비뼈와 거친 피부를 갈라 그 몸에 쏙-하니 들아 가는 장면을 종종 상상했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상상하는 시간은 길어져만 갔다. 좀처럼 그 날의 솔직함 같은 건 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맨 정신의 그는 늘 빙글빙글 웃었고, 가끔 누군가 화나게 할 때만 그때로 돌아갔다. 이런 문제엔 최악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 승부욕엔 불이 붙었다. 나는 자주 그를 화나게 했고 그것만이 내가 나를 사랑하는 채로 두는 일이었다. 저 머릿속에 들어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가끔은 그가 된 양 거울을 보고 대화를 하기도 하고, 실제로 그와 얘기를 할 땐 그를 이해하는 데에 온 정신을 쏟기도 했다. 그러나 이 부단한 노력에도 몸을 반으로 갈라 속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은 멈출 수 없었다. 한참 그런 상상을 반복했고, 그러다 어느 날인가부턴 우리는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그 후에도 한동안 상상을 계속하였으나 얼굴이 기억도 나지 않을 때쯤엔 자연스레 멈추어졌다. 모든 걸 알게 된다면 완벽하게 사랑할 수 있을 거란 오만으로 가득 차 있을 적이었다.

3
대부분의 바람들이 그러하듯 이번에도 신은 나의 편이 아니고, 둘 사이엔 숨 막힐 듯한 침묵만이 고요하다. 거기엔 익숙한 이가 서 있었다. A였다. 만나면 어떤 말을 해야지 하고 수백 번도 더 생각했건만 나오는 건 겨우겨우 소리 없는 숨소리다. 앳된 얼굴의 A는 여전했다. 다만 못 보던 코트를 걸치고 있어서일까. 익숙한 얼굴이 어쩐지 같으면서 또 다르게 보였다. 그를 처음 만난 날인 양 설레였고, 동시에 찌르르하고 아팠다. A의 새로 자른 머리는 썩 잘 어울렸다. 손을 쭉하니 뻗으면 햇살처럼 간지러운 그것이 손 틈새로 헤엄쳐 나갈 것만 같았다. 저 작은 머리통을 품에 안는다면. 쏙 안고서 부드러운 머리칼을 빗길 수 있다면. 이미 아는 예전의 감촉이 두둥실 날아다녔다.

종종, A를 헤매었다.
자주 가던 카페라던가 좋아하던 술집 혹은 피시방에도 발걸음이 닿았으나 예전과 다르게 우연 같은 건 없었다. 가끔은 기억력이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좋아져서 언젠가 그가 한번 말했던 책을 뒤지기도 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혹시 그걸 알게 된다면 뭔가 되돌릴 순 없을까 하고. 물론 남는 건 이제 우연은 없을 일이라는 깨달음과 도무지 알 수 없는 인간이라는, 동시에 이런 이의 무엇에 반했던가 하는 미스터리였다.

그토록 바랬던 우연은 참 늦게도 나타나 허를 찔렀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안부를 물었고 예상대로의 대답만이 이어졌다. 그렇게 짧은 인사 후에 우린 지나쳤다. '뒤돌아보지 말아야지' 라는 건 역시 힘없는 생각이었다. 고개를 돌렸고 그이의 뒷모습이 흐릿했다. 이상하게도 얼굴이 아닌 뒤통수를 보자 엉망인 실타래가 '탁'하고 풀리는듯했다. 사실 그때에도, 그 예전에도 그러했다. 언젠가부터 뒤를 쫓는 나의 눈길은 결국 아무것도 따라잡지 못했고, 뒤처져서 천천히 걸을 따름이었다. 이따금씩 심통이 나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린 다른 세계에서 각자의 것을 보고 있었는걸. 하긴, 우리가 '우리'라고 불릴 때가 존재하긴 했었던가. 점점 달아나는 그 달 한 조각은 애초부터 같은 곳을 걸었던 게 아니라는 것만 같아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모든 걸 부정당한 기분이 적잖이 쓰라렸다. 허공에선 '빵-' 하는 경적소리만 맴돌 뿐이었다.

4
B는 여러모로 A와 비슷한 아이였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둘은 다른 점도 많지만 내 취향에 쏙 맞는다는 점 하나만큼은 놀랍도록 비슷하다. 사소하게는 완벽한 청바지를 고를 줄 아는 안목(사실 이건 전혀 사소하지 않고 대단한 능력이라 생각한다)부터 결국 끝까지 자기 얘기는 안 하고 입을 꾹 다물다 내 패를 꺼내야만 조금씩 제 것을 털어내는 모양새까지. 최후의 최후까지 속을 모를 인간이란 점이 제일 똑같았다. 다른 그림 찾기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렇게 문답을 주고받던 어느 날엔 B의 뒷모습에 A의 등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대체로 남의 등이란 다 비슷한 것일까. 문득 같은 과거가 반복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우리는 선을 넘겠지. 그 선을 넘고 나면 결국엔 구질구질해지겠지. 보고싶어라던가 넌 내꺼라던가 하는 말을 참지 못해 뱉는 하나와 가벼운 농담과 웃음으로 넘기는 또 하나가 되어. 그 망할 핑퐁을 서로 몇 번씩 주고받다 최후엔 양쪽 다 너덜거리는 마음만이 자리에 남겠지. 살을 섞고 서로의 아픈 얘기를 하고 시선을 주고받다 보면 담배에 불이나 붙이다 어느 날은 주저앉아 엉엉 울겠지. 필터까지 다 타버린 담배가 우리 미래라고 자조하던 그 날처럼. 품에 안고 볼을 부비던 하루들조차 희미해질 때쯤, 나는 한 C쯤과 같은 걸 반복하려나 상상을 하며 실소를 터뜨릴 수도 있겠다. 아 말이 길었다.

Feb 9, 2017

매거진의 이전글 D-day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