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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리안 Jan 10. 2024

눈 내리는 남한산성



예보에 있던 눈이 어김없이 내리는 날

눈발을 맞으며 남한산성을 오른다

멀리 한양 도성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성곽 주변 비탈진 길을 오르며 생각한다

무능해서 어리석음을 낳았고, 수많은 날을

두려움으로 인해 의혹에 시달린 어떤 이를

불안은 의심을 부르고 끝내 분노를 일으킨다

초조함에서 비롯한 그릇된 역사

슬퍼서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고, 그 나약함을

그 번민을

심리적 충돌에 의한 무게감에 생각이 미치며

공손히 산성을 내려온다


인고의 세월 속에서 소나무는

기세등등이 여전히 푸르다, 지금

남한산성 높은 망루엔 한 치의 미혹도 없이 바람이 분다


모르는 사이, 위기의 한순간처럼 눈이 쌓여 

경사진 길을 내려가다 보면 의구심이 밀려오기도 한다

천천히 걸어도 곧잘 미끄러지는 눈길을

오래 걸려 도착할 집으로 가는 눈 내리는 길을

성곽 사이,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을 수많은 넋을

켜켜이 쌓아 올린 백성의 돌덩이 하나하나를

소소한 두려움으로 변명될 수 있을까

지금에야 

바람에도 끄떡없는 추운 산성 길을

엄동설한, 굽이돌아 살을 에며 오르내리던

병자호란의 매서운 칼바람을




#시작 노트

잔뜩 흐리던 하늘에서 급기야 눈이 내린다.

어지러이 흩날리는 눈발을 맞으며 성곽길을 걷는다.

남문 입구까지 빠르게 오르자 땀에 흠뻑 젖는다.

지금의 추위쯤이야 추위도 아닐, 병자호란의 꽁꽁 얼어붙은 강바람과 민심에 마음이 치우친다.


피는 피를 부르기 마련이다. '인조반정'과 '12·12 쿠데타'는 장악 양상이 서로 닮았다. 

인조 능양군이, 광해군에 의해 경운궁에 유폐 중이던 왕실 최고 어른 '인목대비'에게 

옥새를 바치고 읍소하여 '언문 교지'를 받아내 즉위하던 순간과 

12·12 군사반란 주역들이 정승화 참모총장 긴급체포를 대통령 권한대행 최규하에게 

'사후 재가'로 받아내 쿠데타에 성공한 시점이 닮아있다는 사실은 못내 씁쓸하다.


반정군에 의해 자하문과 돈화문이 차례로 열리고 마침내 창덕궁을 장악했다. 

'인조반정'은 왕위 찬탈을 노린 '능양군 인조'와 '서인 세력', 원수나 다를 바 없는 광해군의 폐위를 

절실히 원했던 '인목대비'의 한이 맞물려 각자의 쟁탈을 위해 야합을 벌인 형국이었다. 


인조는 왕의 자리에 올라 살육을 일삼은 칼의 역사를 썼고, 전두환은 총을 겨누어 탄압의 역사를 저질렀다.

'왕위 찬탈', 역사가 바뀌는 순간의 단초는 후대에 돌이킬 없는 부끄러운 상처를 남긴다.


극심한 번뇌에 시달렸을 인조의 여러 가지 생각에 미치며 눈 쌓인 산성을 내려온다.

'인조'와 '병자호란', 청나라에서 8년간의 오랜 인질 생활에서 풀려나 귀국한 지 세 달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 '소현 세자'와, 같은 사인으로 사망한 인조의, 지질한 소명에 대해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혹을 남긴 채 남한산성 긴 성곽 위로 하얀 눈이 소리 없이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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