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정보가 너무 많다. 이 말도 좋아 보이고 저 말도 좋아 보인다. 부동산이 오른다는 사람 이야기도 신빙성이 있고, 주가가 내릴 거라는 이야기도 뭔가 신빙성이 있게 들린다.
하지만 이런 정보들은 내가 직접 변수를 통제하지 않고 무작정 받아들이는 정보이기에,
'나의 우선순위'라는 키워드 필터링이 없어서 혼란스러움이 가중되곤 한다.
한때는 자서전을 많이 봤었다.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꽤나 많은 인사이트를 주는 일임에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읽을수록, 타인의 관점과 의지가 나에게 투영되는 일이 잦아졌다. 그가 살아온 삶과 내가 살아온 삶이 다름에도 무작정 좋아 보이는 것을 적용해 보는 방식은 생각보다 리스크가 크다는 것도 경험했다.
주체적인 경험과 지식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게 되는 패턴은, 엉뚱한 결과를 마주하는 횟수를 증가시켰다. 결과적으로 정보의 홍수에서 허우적대는 일은 참으로 피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떤 가치판단을 위해서는 근거가 필요하고, 이러한 근거를 위해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거나 수용하는 과정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쏟아지는 정보들을 마치 슈퍼컴퓨터처럼 연산하며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모두 정확히 걸러낼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했을 때, 미디어에 노출되는 시간의 절반은 줄여야 함을 알면서도 실행하지 못하는 일은 서글픈 일이기도 하다.
여행정보, 맛집정보, 세일정보, 온갖 정보가 넘쳐나지만 정작 나를 위한 정보는 없다. 자극성 정보에 언제나 노출되다 보니 자극적이지 않은 건강한 정보는 선택하기 어렵다.
그리고 잘 보면 대부분 '좋은' 정보를 가장한 광고인 경우가 90%이다. (흔히 보는 연예인 짤마저 모두 연예인 광고다) 교회를 다니지만 성경책 한 구절 찾아 읽는 것보다 성경 읽어주는 계정을 팔로우하고 랜덤 하게 보여주는 말씀 한 구절 읽는 게 어찌나 편하던지.
이렇게 우리는 지극히 능동적인 것처럼 보이는 세상 속에 완벽히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제대로 선별할 수 없을 것 같으면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이 지혜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주로 나오는 주제는 '친구'인데 친구는 중요하지만 살아보면 한편으론 또 그렇게까지나 가장 중요하지도 않다. 거리상 가깝고 마음을 공유하며 함께하는 대상이지만 정작 내 삶의 핵심적인 부분들을 책임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가장 나쁜 친구는 이기적인 친구가 아니라 헷갈리게 하는 친구다. 삶의 기준이 없고 오직 감정적 선택을 통해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러다 보면 나 조차도 같이 휩쓸려 가는 걸 보게 된다. 특히 누구 험담 들을 때 가장 큰 혼란이 온다. 이런 친구들과 오래 지내다보면 '나'라는 데이터베이스가 정보들을 색인하는 과정에 혼란을 준다. 가치판단이 흐려진다.
모든 정보는 발신자보다 수신자가 중요하다. 어떤 배드 노이즈가 발신되었든 수신하는 사람은 주파수를 돌리며 수신여부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들이 열광하는 콘텐츠들이 좋아 보여도 나에게 그런 것들을 통제할 여력이나 지식이 없다면
나와 무관한 것처럼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이 때로는 최선의 선택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