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이, 그리고 디자이너인 내가 갖는 역할에 대한 고찰
중학교 시절, 휴대폰을 가진 후 가족과 친구들의 연락처를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갈수록 내가 불편함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편리해지면서 망각하는 것들이 늘어났다. 이제까지는 그런 것들에 대해 경각심을 크게 가지진 않았다. 내 일상에 큰 문제가 없었으니까. 무언가를 잊어도 휴대폰을 열면 다 들어있었고, 애써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사토 다쿠의 「삶을 읽는 사고」를 읽으며 편리함이 내게 준 망각의 함정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런 편리함으로 내가, 그리고 우리가 잊어버리고 놓친 것들은 무엇이 더 있을까.
사토 다쿠. 내가 좋아하는 공간인 21_21 디자인사이트의 디렉터 중 한 사람이고 플러스마이너스제로 등의 진취적인 디자인을 내보였다. 또한 디자인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디자이너이다.
「삶을 읽는 사고」는 사둔지 꽤 오래된 책이다. 하지만 디자인 서적이다 보니 손이 선뜻 가지 않다가—일과 관련된 책은 선호하지 않고 평소 잘 읽지 않는 편이다— 사내 독서모임을 계기로 읽게 되었다. 평소처럼 가볍게 읽으려고 했는데 내용도 내용인 데다 이번 모임 호스트가 되어 괜스레 힘이 들어간 상태로 집중해서 읽게 되었다. 그리고 페이지가 점점 넘어가면서 가볍게 읽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 책이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어떠한 형태로든 인간의 삶에는 디자인이 존재하고, 디자인을 업으로 삼은 우리는 책임감을 갖고 인간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놓지 말아야 한다.
사토는 이 책에서 ‘우리가 평소 무의식적으로 상대하고 있는 사물 안에도 수많은 디자인이 감추어져 있다’며 우리는 디자인의 세계 속에 살고 있음을 일깨운다. 그런가 하면 외부의 에너지에도 유연하게 대처하며 본질을 잃지 않는 물처럼 소성적 사고와 태도를 이어갈 것을 권하면서, ‘자신’을 의식하는 스위치가 켜진 순간 자아는 잠에서 깨어나는 즉시 아욕我慾과 직결되고 만다며 스스로를 끊임없이 경계하고 의심하라고 한다.
왜냐면 우리는 디자이너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형태의 디자인으로 이루어진 일상에서 작은 디자인 하나하나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그 영향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것들에까지 닿기에 사토는 디자이너로서의 책임감을 강조한다. 책에서는 주로 그래픽 디자인과 실물 기반의 제품 디자인을 예로 들었지만, 디지털 프로덕트를 만드는 프로덕트 디자이너로서도 생각할 부분이 많았다. 특히나 보이지 않는 경험과 보이지 않는 디자인이라는 키워드에 꽂힌 나로서는 더더욱 그렇다. 책을 읽어나갈수록 '편리함'의 유혹과,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위험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게는 심플하고 단순한 디자인에 대한 동경 같은 것들이 있었고, 그것들을 끊임없이 내 작업물에 녹여내려 했었다. 그런 것들이 이해하기 쉽고 사용하기 편하다는 이유로.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은 조금 불편했다. 그 이유를 몰라 가끔 답답하기도 했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내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저 쉽다는 이유로, 그저 단순하다는 이유로 최소화한다면 그 여백에서 드러나지 않는 암묵지, 함의 등의 컨텍스트를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임을 나는 왜 잊고 있었을까. 이것은 기계가 사람을 완벽하게 대체하지 못하는 것과도 결이 같다. 기계는 분위기와 컨텍스트를 읽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AI는 기존의 기계와는 다른 개념이라 생각한다. AI는 맥락의 학습이 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컨텍스트를 디자인과 함께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사물과 사람, 혹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Connect를 디자인으로 해결해야 한다. 단순한 Linker가 아닌 Connecter로서 존재해야 한다. 과연 나는 그 역할을 잘 할 수 있을까. 앞으로 얼마만큼의 노력을 기울일 수 있을까. 고민이 많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