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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기억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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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혜 Nov 22. 2021

까페 만월경

빛으로 가득한 고래 뱃속


1

 벌써 저녁 일곱시다. 동네를 맹렬하게 걷기 시작한 지 벌써 삼십 분째다. 골목을 지나 은행나무 가로수길을 지나서 간송 옛집까지 갔다가, 다시 은행나무 가로수길을 걷고 있다. 이 시각 가로수길을 지배하는 풍경이란 반질거리는 어둠뿐이거나 오고 가는 자동차들의 날카로운 헤드라이트 빛 뿐이다. 실은 걷는 일 자체에 집중하느라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아무것도 눈에 담지 않았는데, 무언가 이상한 것이 눈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건 검붉은 달이었다. 오래된 구리 동전처럼 녹슨 달이었다. 대기 중에 불순물질이 많은 날에 붉은색의 달이 뜬다고 했다. 달이 지구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는 부분 월식이 일어날 때에도 붉은색을 띤다고 했던가? 만약 월식 때문이라면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임이 분명했다.


 달의 이상한 색깔을 보면서 걷고 있자니 기분이 어쩐지 이상해진다. 이상한 기분 속에서, 이상한 사람이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횡단보도를 건너서 다시 반대편 가로수길을 걸어갔다. 오래 걸었으니 지칠 법도 한데 발걸음이 이상하게 가볍다. 이대로 밤에서 밤까지, 밤의 끊임없는 길을 걷고 싶다. 무도하고 쓸쓸한 언어들이 가득한 밤의 수기(手記)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다. 마지막 붉은 방점 같은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 저만치 따라오던 붉은 달이 어느새 시야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는다. 이상한 기분 속에서, 이상한 사람이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 사람은 이상한 기분이 깨지는 순간까지만 존재하는 사람. 그런데 그 사람은 좀처럼 걸음을 멈출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기분을 멈출 생각이 없는 것 같다.    



2

 동네에는 24시간 운영되는 무인까페가 있다. 이름은 '만월경'. 최근 오픈한 곳인데, 아직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다. 가게를 무심코 지나쳐서 걸어가다가, 다시 가게 앞으로 되돌아왔다. 간판에 둥근 보름달이 그려져 있는 건 그렇다 쳐도, 고래가 나란히 그려져 있는 건 어쩐지 이상하다. 유리 너머 가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일곱 평 남짓 되는 작은 공간이 한눈에 들어왔다. 커피와 기타 음료로 이루어진 메뉴를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연한 아메리카노가 1500원, 진한 아메리카노는 1800원. 이밖에 초코 밀크, 아이스티, 에이드와 마카롱도 있었다. 음료자판기에서 자몽 에이드 한 잔을 뽑아낸 다음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 시간 남짓 맹렬하게 걸었던 터라 앉자마자 피로감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창 밖에는 지나가는 행인 하나 없이 맞은편 가게들의 네온사인만 조용하게 반짝였다. 이곳은 동네에서도 워낙 후미진 구역이어서 지나가는 자동차나 오토바이도 거의 없다. 내가 속한 무인카페는 이름 그대로 아무도 없었고 음악조차 흐르지 않았다. 그야말로 조용한 밤거리의 연장선상에서 조용히 부유하고 있는 공간이었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다가,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원고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곳에서 나머지 글을 쓰면 어떨까 생각했다. 나는 체질상 까페나 도서관 같은 공공장소에서 글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이다. 명확한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른다. 까페에서 쓴 글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경직되어 있고 얼어붙어있어서 고치지 않고는 배길수가 없다. 반면 나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이를테면 내 방-써내려간 글들은 대부분 호흡이 자연스럽다. 이곳은 사장도 없고, 종업원도 없고, 이용하는 사람들도 거의 없는 무인까페니까, 어쩌면 글이 잘 써지지 않을까? 무인까페 같이 색다른 장소에서 쓰는 글은 좀 색다르지 않을까?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 보니 배가 고파졌다. 자판기에서 르뱅 쿠키 하나를 결제해서 에이드와 함께 먹기 시작했다. 까페는 여전히 조용했고, 나 말고는 아무도 없고, 앞으로도 백만 년 동안 조용할 것만 같았다. 창 밖의 어둠이 한층 새까맣게 반질거렸다. 문득 가게 간판에 그려진 덩치 큰 고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심해를 유영하는 고래 같은 무인까페. 한번 삼킨 손님을 도무지 뱉어내는 법이 없는 무인까페. 그만 말하는 법도 잊어버린 조용한 고래-무인까페... 그렇게 고래 뱃속에 들어앉아 있는 기분을 느끼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것은 어둡지도, 끈적하게 흘러내리지 않는 환한 시간이었다. 가까스로 카페를 나서면서, 한번쯤 자정이 넘은 시간에 찾아와겠다고 생각했다. 이른 새벽의 무인까페는 또 얼마나 고요하게 빛날지 궁금했다.



2021.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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