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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기억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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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혜 Nov 24. 2021

불 타는 환풍기

불이 났다. 불이 꺼졌다. 연기가 자욱했다.



찬거리를 사러 동네 재래시장에 가는 길이었다. 교차로 앞 허름한 상가 주변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대수로운 풍경이라기엔 어쩐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가까이 가보았더니, 상가 건물 1층 가게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어떡해!", "윗층에 사람이 살지 않아요?", "119에 전화해요 얼른!" 나와 마찬가지로 지나가던 행인들이 하나 둘 걸음을 멈추고 소란에 가담했다. 개중에는 안색이 하얗게 질려서 발을 동동 구르는 아주머니가 한 명 있었다. 아주머니는 자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상대방이 도무지 전화를 받지 않는 모양이었다. 건물 2층 창문 쪽에서도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소방차가 도착하려면 십 분 정도가 걸린다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부는 바람에 실려왔다가, 다시 흩어졌다. 불이 난 1층 가게는 청소년들이 자주 드나드는 뽑기 가게였다. 문은 굳게 잠겨 아무도 들어갈수 없었고, 연기 때문에 내부 상태가 어떤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때 자욱한 연기 속에서 불꽃이 세게 일었다. 'I'm The King'이라고 씌여진 가게 간판 아래에 달린 조그마한 환풍기가 불타고 있었다. 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환풍기는 불이 붙은 채로 돌아가고 있었다. 좀더 자세히 보려고 다가가는 순간, "비켜요!"라는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내 앞으로 끼어들었다.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소화기를 들고 와서 환풍기 쪽을 조준했고, 불꽃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오직 연기만이 자욱하고 끈질기게 상가 건물 전체로 퍼져나갔다.'I'm The King'이라는 문구와 함께 그려진 근육질의 남자도 검은 연기에 휩싸여 모습을 감췄다. 이윽고 일곱 대나 되는 소방차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차례차례 도착했다. 완전무장한 소방대원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만 발걸음을 돌렸다. 길을 막고 선 숱한 사람들을 지나쳐 앞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그 시각 불이 난 상가 건물 일대는 완전히 멈춰있었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도로 위 자동차들도 멈춰선 채 시끄러운 적막을 빚어내고 있었다.




2021.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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