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꺼내고 싶지 않던 이야기
나의 엄마는 희귀난치병인 '헌팅톤'을 앓고 있었다. 이름 조차 생소한 이 병을 알게 된 것은 2000년 대학4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 47세 밖에 안되었던 엄마는 치매 증상에서나 볼 수 있는 심한 기억력 감퇴, 외출 한 뒤 집을 찾아오지 못하거나 음식 하는 법을 잊는 등의 행동을 반복했다. 그와 더불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을 좌우로 흔든다거나 손과 발을 계속해서 움직이는 등 이상증세를 보였다. 그리고 가슴에서 유방암 처럼 보이는 흔적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동생과 나는 겁이났다. 의사선생님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엄마의 병이 더이상 두고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사형선고를 받으러 가는 죄수마냥 그렇게 끌려 가 듯 병원으로 향했다. 엄마는 예상했던 것과 같이 유방암이었다. 다행이 한쪽 가슴을 절개하는 것으로 잘 마무리 되었지만, 그 보다 더 무서웠던 것은 '헌팅톤'이라는 병이었다. 47세인 엄마의 뇌는 치매를 가진 80세 노인에게서나 볼수 있는 뇌신경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생소하기 이를데없는 병은 100% 유전을 통해 발병이 된다는 것이다. 염색체 이상으로 생기는 이 병은 유전 질환이다. 그랬다. 엄마는 돌가신 할머니와 너무 닮았다. 그리고 서른 중반에 떠난 막내 이모와 같은 질환을 가지고 있었다. 엄마는 4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고, 아래로 삼촌인 남동생과 이모 둘을 동생으로 두었다. 안타깝게도 가장 먼저 세상을 등진 첫째 이모는 당시 이십대 초반으로 뇌막염을 앓다 끝내 사망했다. 그 때 나는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 였고 8년 즘 지나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되던 해 바로 아랫동생인 삼촌이 사망했다. 삼촌의 사망 원인은 사고사였다. 그리고 내가 대학 졸업을 하고 사회복지사로 일한지 3년쯤 되었을 때 막내 이모가 결국 '헌팅톤'으로 사망했다. 그렇게 동생 셋을 먼저 보낸 엄마는 2007년 지독하게 외롭고 고통스러웠던 질병으로부터 영원히 벗어 났다.
나에게 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트라우마'와도 같다. 지금의 나와 비슷했던 나이에 겪어야 했던 인생의 모든 고통을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엄마를 곁에서 지켜보며 보살펴야 했던 나의 젊은 날을 지금에서야 스스로 토닥여 본다. 이제 그 고통의 시간들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세상 밖에 꺼내보려고 한다. 느닷없이 찾아온 공황장애, 빚더미, 보이지 않는 구속, 자유로운 삶에 대한 갈증, 빛이 없는 미래... 나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불안과 공포의 상자를 열면 튀어 나오는 온통 불행한 단어들 뿐이었다. 나는 그때 나의 신과 약속 했다.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났을 때 나에게 주신 은혜의 삶을 기록해 보겠다고...
지금이 아니면 수심을 알 수 없는 검푸른 바다 밑에 가라앉힌 이야기들을 애써 꺼내고 싶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로 옮기기로 마음먹은 것은 나의 삶에 자유와 책임이라는 것을 허락하신 신에 대한 감사의 표현 일지도 모르겠다. 곧 엄마의 기일이 다가온다. 올해는 그녀가 그토록 좋아하던 꽃을 선물 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