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종합병원의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찾느라 길을 헤매었다. 4층으로 올라가 겨우 인사를 나누자마자 간호사가 아빠의 이름을 불렀다. 아빠는 내시경을 하러 들어가고 엄마와 나는 병원 의자에 앉아 한 시간 정도를 기다렸다.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고 내 긴 머리가 짧게 잘렸을 때, 이젠 기억에 남은 게 별로 없는 그때는 아빠 혼자서 이 병원 검사실에 들어가는 엄마를 기다렸을 테다. 엄마는 아빠에게 너무 많은 고생을 해서 지금은 너무 억울하니까, 당신 건강 스스로 잘 챙기라고 했다고 한다. 아빠는 조금은 두려운 듯 말수는 적어지긴 했지만 두 분 다 덤덤하게 받아들이셨다.
얼마 전 엄마와 연극 ‘친정엄마와 2박 3일’을 보고 왔다. 몇 년 전부터 보고 싶다고 하신 게 생각나서 예약을 하고 다른 가족들에게 같이 갈 것을 물었으나 모두들 거절했다. 결국 엄마와 둘이서 공연을 봤다. 공연은 5분마다 눈물이 쏟아질 정도로 슬펐다. 엄마는 생각보다 많이 울지는 않았다고 하는데 공연이 끝나고 우리를 데리러 온 아빠를 봤을 때 울컥했다고 한다. 엄마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이제 엄마한테 엄마는 아빠인가 봐, 하며 웃어넘겼다. 그때는 그저 30여 년을 함께한 부부의 모습으로, 내 미래를 비춰보기도 하며 좋게 느끼기만 했다.
그리고 보름 뒤에 아빠의 위에 암으로 의심되는 종양이 발견되어 서울의 큰 병원으로 진료를 보러 왔다. 운 좋게도 예약하기 힘든 종합병원에 빠르게 날을 잡을 수 있었고, 아직 결과를 보려면 보름을 더 기다려야 한다.
부모님은 23년 전부터 수십 번씩 드나들던 병원의 구조를 줄줄이 꿰고 있다. 어느 쪽으로 가면 무엇이 있고, 어디로 가야 빠른지, 아빠는 마취가 덜 깬 상태에서도 그걸 다 기억하며 나를 버스정류장으로 바래다주었다.
새 학기를 맞아 원에 등록한 아이들의 이름이 아직 헷갈리는데도 3월이 끝나버렸다. 너무 정신없는 3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