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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영 Apr 17. 2019

4월

비인간 동물과 함께 사는 사회는-





얼마 전 강원도 곳곳에서 번지는 산불 속보에 새벽까지 잠을 설쳤다. 속보를 보다가 내가 그 상황이었더라면 어쩌지 하고 상상을 하자 두려움을 느꼈다. 나는 자세히 상상을 했다. ‘마스크를 쓰고 적신 손수건을 챙겨 나는 배낭에 물을 넣어 가지고 나오자. 남편은 이동장에 넣은 첼시를 적신 담요로 감싸 데리고 나와야겠다’ 하지만 상상은 여기서 끝이다. 첼시와 함께 짐을 싸서 나온다 하더라도 첼시를 데리고 갈 수 있는 대피소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피소 문 앞에서 불안에 떨어야겠지. 이번 산불로 많은 가축들이 죽었다. 또 집계되지 못한 산속의 동물들도 있을 테다. 동물에 대한 피해보상은 동물 사망 시에만 가능하다는 글을 보았다. 새끼를 밴 몸으로 화마에서 스스로 쇠사슬을 끊고 탈출한 소는 코에서 피를 흘리며 화상을 입었지만 죽지 않았기 때문에 치료에 대한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다. 살아있으나 상처 입은 동물을 안락사시키면 또 보상금 지원이 된다 하니 기가 찼다. 그 어미소의 주인은 다친 소를 구조하겠다는 동물권 단체에 소값과 뱃속의 송아지 가격까지 요구했다고 한다.

어제와 오늘은 실험실에서 태어나 탐지견으로 활동하던 복제견이 다시 실험실로 보내져 또 다른 실험에 이용되다가 결국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괴로워했다. 갈비뼈가 보이도록 앙상해질 때까지 무슨 일을 벌인 걸까. 그 지경이 되도록 아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걸까.


사람이 정한 비인간 동물의 생명의 무게가 너무 가벼워서 어떤 사람들은 그 생명이 느끼는 고통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대한다. 비인간 동물을 소비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학대는 너무도 쉽게 잊혀있다. 크고 작은 고통을 조금씩 알아갈 때마다 괴롭다. 나는 행동하지 않으면서 말만 늘어놓고 싶지 않아서, 실천하지 않는 게 부끄러워서 말을 하는 것이 어렵다. 부당함을 알면서도 익숙하고 편리한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내가 비난하고 있는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동물권에 대해 생각을 하면 나는 늘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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