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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훈 Jun 19. 2020

2020.02 – 2020.06

분기별 일기

2020.2.11.

중국의 문장가 구양수는 생각하기 좋은 곳으로 '마상(말위), 침상(잠자리), 측상(화장실)'을 꼽았다는데, 대체로 공감한다. 다만, 나의 경우 상기한 공간이 새로운 생각의 발원지라기보다 생각을 마무리하는 종결지다.


2020.2.26.

스스로 끼나 흥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비 온 다음날 출근길은 예외다. 창문을 활짝 열었을 때 축축하고 서늘한 공기가 느껴지면 흥이 난다. 이럴 때면 평소 기피하는 요란한 음악을 큰 소리로 틀고 손가락을 까딱이며 한껏 리듬을 맞추기도 한다.


2020.3.17.

성취보다는 안정, 사람보다는 사랑 같은 것들이 중요하다.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나는 관계로부터 이익을 추구하는 법을 모른다.


2020.4.2.

가장 좋아하는 단어를 고르라면 주저 없이 '위안'을 꼽는다. 내가 아는 한 누군가에게 위안을 주고 누군가로부터 위안을 받는 것만큼 거룩한 일은 없다.


2020.4.17.

나옹이가 의자에 앉은 내 발에 몸을 기대어 자고 있다. 이럴 때면 나는 한참이나 꼼짝도 않고 나옹이가 일어나길 기다린다.

나옹이는 올해로 18살인 옥색 눈의 고양이다. 자신의 피부와 사람의 피부가 닿는 감촉을 좋아하며, 하루 중 꽤 많은 시간을 침을 흘리고 졸면서 보낸다. 최근에는 활동량도 줄어들고, 소화능력도 떨어졌다. 집에 들어갈 때 나옹이가 문 앞에 나와 있지 않으면 다급하게 나옹이를 부르게 되었다. 남은 시간 최대한 곁에 있어줄 생각이다. 그리고 언젠가 나옹이와 이별하게 된다면, 정성스러운 글을 남겨 나옹이를 기억하고 추모해야겠다.


2020.5.2.

계속 결혼 소식이 들린다. 일주일에도 몇 번씩 이성을 소개해 주겠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나에 대한 호의의 표현이라 감사하나, 동시에 소개해주겠다는 상대의 배경을 듣는 것이 불편하다. 결혼은 현실이라지만, 결혼에 있어서만큼은 마냥 이상주의자이고 싶다.


2020.5.25.

부산에 왔다. 노년이 되면 배우자와 한 곳에 적을 두지 않고 사는 상상을 했다. 헤겔사전에서 노년은 "주관성과 객관성의 통일의 성취"라고 했는데, 이러한 성취가 조건 없이 주어지는지 궁금해졌다.


2020.5.28.

내게 결혼은 흔들리지 않는 위안을 얻는 일이다. 신앙을 갖는 일이다. 이런 갈구와 신중함 탓에 아직도 미혼이다. 때때로 조급해진다.


2020.6.8.

"건축학을 모르면서도 글짓기는 집짓기와 유사한 것이라 믿고 있다. 지면(紙面)이 곧 지면(地面)이어서, 나는 거기에 집을 짓는다. 건축을 위한 공정 혹은 준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식을 생산해낼 것. 있을 만하고 또 있어야만 하는 건물이 지어져야 한다. 한 편의 글에 그런 자격을 부여해주는 것은 (취향이나 입장이 아니라) 인식이다. 둘째, 정확한 문장을 찾을 것. 건축에 적합한 자재를 찾듯이, 문장은 쓰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다. 특정한 인식을 가감 없이 실어 나르는 단 하나의 문장이 있다는 플로베르적인 가정을 나는 믿는다. 그런 문장은 한번 쓰이면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다. 셋째, 공학적으로 배치할 것. 필요한 단락의 개수를 계산하고 각 단락에 들어가야 할 내용을 배분한다. 가급적 각 단락의 길이를 똑같이 맞추고 이를 쌓아 올린다. 이 시각적 균형은 사유의 구조적 균형을 반영해야 한다."  -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건축이라는 단어에 여전히 설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은 시간이 지날수록 아름다워진다.


2020.6.18.

행복은 소유의 양이 아니라 관계의 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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