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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훈 Sep 16. 2020

2020.07 – 2020.09

분기별 일기

2020.07.03.

내 별명은 어류와 양서류를 크게 벗어난 적 없다. 입모양은 먹이 사냥에 성공해서 의기양양한 메기처럼 아래로 쳐져있고, 목소리는 늦은 밤 짝을 찾는 두꺼비의 처량한 울음소리처럼 낮다.  


대학교 기숙사 근처 연못에는 두꺼비가 많이 살았다. 두꺼비들은 밤이 되면 줄지어 인근의 숲으로 갔다가 낮이 되면 다시 연못으로 돌아왔다. 숲과 연못 사이에는 도로가 있었고, 바닥에는 차에 깔린 두꺼비 시체가 흔했다. 나는 늦은 저녁에 목장갑을 끼고 두꺼비들을 목적지까지 옮겨주곤 했는데, 그 녀석들은 내게 잡혀도 발버둥 치지 않고 태평하게 입을 쩝쩝거리며 얌전히 있었다. 그리고 물끄러미 까만 눈동자로 내 눈을 응시하곤 했다.


만화 ‘개구리 왕눈이’를 보면 메기와 두꺼비는 왕눈이를 괴롭히는 악당이었다. 그래서 어릴 적엔 메기와 두꺼비가 미웠는데, 이제는 동류의식 같은 것이 생겼다. 메기 매운탕 먹고 싶다.



2020.07.15.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2020.07.21.

일가를 이룬 사람이 부럽다.

한자 그대로의 의미인 ‘가족을 이룬 사람’, 그리고 관용적 의미인 ‘한 분야의 업적을 이룬 사람’이 모두 존경스럽다. 이런 생각이 들면 이따금 초조해진다. 변하지 않는 위안이 필요해진다. 위안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2020.07.31.

단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날씨가 좋은 거 같아요.”, “의자가 예쁜 거 같아요.”, “기분이 안 좋은 거 같아요.”처럼 자신의 감정이나 의견을 타자화하는 말하기가 싫다.

“날씨가 좋아서 기분이 좋아요.”, “의자가 예뻐서 맘에 들어요.”, “기분이 안 좋아서 말하지 않을래요.”처럼 분명한 말하기가 좋다. 분명한 사실이나 자신의 감정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할 것,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다.



2020.08.07.

내일의 희망보다 과거의 경험을 말하는 일이 많아졌다. 꼰대는 어느덧 성큼 다가왔다.



2020.08.12.

점심시간에 회사 동료들과 ‘무서워하는 것’에 대해서 말했다. 나는 ‘벌레’가 무섭다고 했고, 동료 중 한 명은 ‘벌레를 무서워하는 것은 더 진화한 인류의 특징’ 일 것이라고 했다. 해충이나 오염을 회피하는 것이 안전하고 건강에 이롭다는 학습된 내용이 유전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벌레가 무섭다.’는 말로 칭찬받을 수 있다고 상상한 적 없는데, 참으로 따뜻한 사람이다.



2020.08.20.

모교에서 음반 레이블 낙소스의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를 지원한다. 최근 리게티(Ligeti), 패르트(part), 리히터(richter) 등의 현대 작곡가 앨범을 힘겹게 듣고 있다.

몇 년 전 객석에서 음악평론상을 공모한다기에 지원했었다. 음악공연 평론과 자유주제를 각 한 편씩 써야 했고, 글의 분량이 A4용지 스무 장이 넘었다. 음악공연 평론은 프로그램이 현대곡으로 가득했던 어느 공연에 대해서 썼고, 자유주제는 우리가 현대음악을 들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썼다. 공모는 적격자 없음으로 수상자 없이 종료했다.

현대음악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겐 우리의 음악이 필요하다.

Der Zeit ihre Kunst, Der Kunst ihre Freiheit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2020.08.23.

섬을 좋아한다. 여행을 좋아한다. 섬 여행을 좋아한다. 섬의 고립과 도피로서의 여행을 좋아한다. 제주에 갔더니 태풍이 왔다. 도피했고 고립된 줄 알았다. 그러나 핸드폰은 시퍼렇게 남아있다.



2020.09.09.

감염병 시대의 운동으로 등산을 택했다.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10km)에 남한산성이 있어서, 운동을 겸하여 뛰어서 오르곤 하는데 썩 만족스럽다.

나는 바다보다 산이 좋고, 물보다 나무가 좋다. 논어에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장수한다.”라는 말을 좋아하여 자주 인용한다.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지만,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냥 그렇다고 하자.



2020.09.16.

본격적으로 논문을 쓰기 시작한 이후, 회사와 집에서 하루 종일 글자를 읽거나 쓴다. 회사의 읽기와 쓰기가 범람하는 하천에서 쏟아지는 물을 막아내는 기분이라면 집에서의 읽기와 쓰기는 계속해도 줄지 않는 설거지를 하는 기분이다. 묵묵히, 미련하게 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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