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가 소개하는 55명의 재즈 뮤지션, 55장의 앨범
일본 불세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그를 상징하는 기호품을 2가지 꼽으라면 단연 '위스키'와 '재즈'일 것이다.
하루키의 위스키 사랑은 널리 알려져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이라는 에세이를 썼을 만큼, 그는 누구보다 위스키에 진심이다. (현재는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면>이라는 제목으로 개정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엄청난 재즈 애호가이기도 하다. 일본말을 빌리자면, '재즈 오타쿠'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하루키의 소설을 읽다 보면 언제나 '음악'이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책을 펼칠 필요도 없이, <노르웨이의 숲>은 이미 제목부터가 그 비틀즈의 명곡이 아닌가! 하루키는 1949년생답게 6070의 올드팝도 좋아하지만, 그 이상으로 재즈에 심취해 왔다.
애호가들은 항상 좋아하는 것들을 남들에게 떠먹여 주고 싶어 안달이다. 하루키 역시 친절하게도, 본인 취향의 재즈 음악들을 에세이로 엮어 내놓아주었다. 제목은 <Portrait In Jazz>, '재즈의 초상'이다.
1992년, 일러스트레이터 '와다 마코토'의 전시회에 간 하루키는, 거기서 재즈 뮤지션들의 초상화를 보고 이 에세이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하루키는 단순히 그들의 인생이 어땠고 장르가 어떻고 등의 뻔한 설명을 늘어놓지 않는다. 대신, 자신에게 어떤 추억이 있고 어떤 인상을 남겼는지, 그 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역시 소설가답달까?
풋풋한 쳇 베이커, 섬세한 빌 에반스, 시크한 마일스 데이비스... 그 밖에 덜 알려진 뮤지션들도 다수 소개되었다. 총 55명의 재즈 뮤지션과, 하루키가 고른 55장의 앨범. 그 중 겨울 이맘때 듣기 좋은 곡들을 꼽아 유튜브 링크로 남겨둔다. 그리고 책에서 발췌한 하루키의 감상도 덧붙여본다.
"쳇 베이커의 음악에서는 청춘의 냄새가 난다. 재즈의 역사에 이름을 남긴 뮤지션을 수없이 많지만, '청춘'의 숨결을 이토록 선명하게 느끼게 하는 연주자가 달리 있을까?"
"모든 트랙이 다 멋지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은 <마이 풀리시 하트>. 달콤한 곡이다. 이렇게까지 몸에 파고들면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다. 세계를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풍요로운 바이올린은, 뒤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러나 윤택하고 깊이 있게 사람 마음의 떨림을 노래한다. 이 곡을 들으면, 다시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슬며시 생겨난다."
"나는 신기하게도 힘을 얻는다. 비록 소니 롤린스의 최고 걸작이라 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거기에는 분명히 부드러운 둔기처럼 사람의 마음을 때리는 것이 있다."
"연주의 질도 높고 의욕도 충분하고, 신기하게도 퇴보적인 느낌이 전혀 없다. 요즘은 이렇게 '저력 있는 어른의 놀이' 같은 앨범을 별로 만날 수 없다. 신나고 아주 좋은데."
"특히 발라드와 상큼함과 거기에 담긴 정감의 깊이에는 그저 두말 않고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첫 문장부터 자기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는 완성도 높은 단편소설 같은 정취가 있다."
재즈란 보편적으로, 이미 만들어진 곡을 연주자가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 자기 마음대로 연주한다. 하루키 왈, 그는 글 쓰는 법을 음악의 리듬에서 배웠다고 한다. 그의 소설에서 엿보이는 상상력과 흡입력은 재즈에서 온 것이 아닐까, 언제나 생각한다.
이 책에서 다룬 뮤지션들에 대한 나의 생각이 그대와 다르더라도 크게 마음 쓰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그저 음악을 즐겨 듣고 문장을 즐겨 쓸 뿐이다. 만약 만사가 순조롭게 잘 흘러가서 내가 느끼는 보금자리의 온기를 그대도 느낄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기쁨이 없겠다.
음악을 문장으로 옮겨내려 애쓰는 입장으로서, 참고가 되는 말이다.
[출처]
표지 사진 : 木村和平
와다 마코토 씨의 사진 : 産経新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