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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ment books May 05. 2021

커피나 한 잔

커피나 한 잔



1. .... Drinks Another Coffee And She Finds It Hard To Stay Awake


매일같이 출근하면 커피를 마신다. 아니, 사실 출근하지 않는 날에도 커피를 마신다. 그런데 유독 일하는 때에 커피를 더 자주 찾는다. 별다른 이유는 없을 것이다. 습관적으로, 피곤해서, 스트레스로 더 자주 마시는 것일 테다.


나는 하루에 세 잔의 커피를 마셔도 피로가 풀리지 않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자랑스럽게 "나는 아침형 인간이다"라며 사람들에게 알리며, 스스로 무척이나 부지런한 편이며 이른 아침에 엄청난 아이디어와 창작물들을 만들어낼 줄 아는 천재형 인간처럼 보이고자 노력해보곤 하는데, 실상 요즘에는 오전에 가장 몽롱한 상태로 있는다. 폴 매카트니의 <Another Day> 가사처럼, 커피 한 잔을 더 마셔도 이상하게 온전히 깨어있는 상태로 머물기 힘들다.  


심한 경우에 나는 오전에 이미 커피 세 잔을 들이켠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릴 정도가 되면 이제 곧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고 잠시 후에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돌아온다. 유쾌한 기분마저 들면서 들어오는 길에 다시 커피 한 잔을 사들고 사무실로 들어간다. 이건, 오후 업무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디저트 같은 것이다.


오후 늦게 다시 커피 생각이 난다. 현재 사무실 내에 진행되는 세상 모든 일들을 나 혼자 다 한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아서이다. 한편으로는 우쭐대는 마음이 들어서, 또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보상 같은 차원으로 커피 한 잔 더 마시기로 결심한다. 다만 내 몸과의 일말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아직도 남아 있다면) 디카페 커피를 마시기로 한다. 기사에서도 오후 5시 이후에 마시는 커피는 몸에 안 좋다고 하니, 나는 그 시간만은 지키기로 하며 만족스러운 상태가 된다.


오후 10시. 오늘 하루 중 가장 정신이 또렷한 때이다. 그러나 몸은 녹초가 되었다. 이 불협화음을 이겨내고자 애써본다. 못다한 외주 작업을 하기 위해 오피스를 구동하거나 읽을거리를 손에 넣는다. 가장 정신이 맑기에 가장 난이도 높은 책을 한번 읽어본다고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펴보는데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오질 않는다. 10장 정도를 읽어 넘긴 것 같은데 무엇을 읽었고 이해한 내용은 무엇인지 도무지 생각나질 않아 화만 더 나버린다. 결국 유튜브를 켜서 눈에 보이는 가장 무익하고 쓸데없어 보이는 콘텐츠(이를테면 '90년대 애니 잔인주의', '프로야구 OOO 웃음벨 모음', '멈춰 프로그램' 같은)를 선택해서 한참을 보다가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내일 계획을 이렇게 세워본다. "6시에 일어나,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스트레칭도 하고 출근을 하는 것이다."


다음날 7시 반에 쇳덩이 같은 몸을 일으켜 세우며 하루를 시작한다.  




2. 온당한 죄책감


불현듯 나는 매우 열성적인 환경주의론자가 된다. 완연한 봄날 길거리를 걸으며 양옆에 나 있는 가로수의 싱그러움과 충만한 생명력에 깊은 감명을 받아서였는지도 모른다. 이전에 제주도에 갔을 때 봤던, 클로버 꽃에 앉아있던 꿀벌의 그 귀여운 움직임과 세상에 온갖 종류의 열매를 생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그 이타적인 행위가 떠올랐을 수도 있다. 아니면 단순히 펩시콜라 광고에서 봤던 그 아이콘적인 백곰이 갑자기 생각나서일 수도 있다.


이 모든 존재들은 사실 여러 이유로 현재 고통받으며 그 개체수가 줄어들고 있을텐데, 갑작스레 이것의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 내가 마시고 있는 커피를 담고 있는 이 플라스틱 컵 때문이라는 생각에 미쳤다. 주위를 둘러보니 많은 사람들의 손에 플라스틱 컵이 들려 있다. 이상한 조사 정신이 발동하여, 주변 테이크아웃 카페에 들린 사람들 중 텀블러를 들고 온 사람이 있는지 유심히 관찰한다. 기대 만큼 있지 않다("아니, 미국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텀블러를 가지고 다니는데!" 라고 속으로 소리친다).


사무실 쓰레기통에도 플라스틱 컵 몇 개가 처박혀 있다. 회사 문 앞에 엄연히 분리수거해서 일회용품을 배출할 수 있는 곳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일 아침이면 청소하시는 분들이 본인의 의무를 다하여 있는 그대로 일반 쓰레기로 수거하여 갔다버릴 바로 그 쓰레기통에 플라스틱 컵을 마구잡이로 버리고 있는 직장동료들이 무척이나 미워졌다. 왠지 친절하지 못한 태도로 그들을 대하게 된다.


나는 실천하는 지식인, 혹은 환경론자처럼 되기로 결심한다. 쓰레기통에 있는 플라스틱 컵을 모아 혼자 분리수거를 하러 나갔다 오고, 사무실에 여럿 사람들이 모였을 때에는 코로나 이슈와 연관지어 '인간이 생존위기에 처해 극복하고자 힘쓰는 모든 노력이, 결과적으로 지구에는 악영향을 미친다'라는 주제로 일회용품 사용의 문제점을 설파한다.


이런 종류의 순전히 자기만족적인 행위를 얼마간 마치고 나니 그제야 마음에 피어올랐던 죄책감 일부가 사그라드는 느낌이 든다. 나는 만족스러워져서 텀블러를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또 다른 커피를 마신다. 결국, 그저 커피 한 잔이 더 마시고 싶었던 것이다.


   

 3. 초조함을 달래며


화장실을 무척이나 자주 가는 편이기 때문에(최근에 병원에 한번 가봐야 하지 않을까 진지한 고민을 해보고 있다) 사실 내겐 커피를 많이 마시는 습관은 결코 좋지 못하다. 그럼에도 커피를 멀리하지 못하는 스스로에 실망할 때가 많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는데, 그에 반대급부처럼 커피를 더욱 가까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혼자 있거나 같이 있을 때 모두 커피를 마신다. 혼자 있을 때면 어떤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이다. 나름의 중요한 기능을 분명히 한다. 단순히 물과 같은 맹맹한 액체가 줄 수 없는 분명한 화학적인 작용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고 알코올처럼 신체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직접적으로 커서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종류의 액체가 아닌, 적당히 신체와 정신을 어떤 일에 경도될 수 있게 만들 정도의 화학적인 작용인 셈이다.


여러 사람과 함께 있을 때에 커피는 훌륭한 대화 촉진제가 된다. 식사를 하면서 하는 대화는 아무래도 다소간 집중해서 이끌어가기 힘들다. 음식물을 씹는 행위와 발성하는 행위가 물리적으로 동시에 원활하게 진행되는 것은 아무래도 어렵기 때문이다. '취중진담'이라는 명목으로 알코올도 대화에서 아주 중요한 매개처럼 간주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 모두가 경험했다시피 소주 두 병을 넘게 되면 대화는 이미 똑같은 주장의 무의미한 반복이자, 내일이면 기억하지 못할 허망한 약속처럼 돼버린다. 커피는 이런 측면에서 분명 일상 대화나 중요한 의견을 나누는 자리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주의를 흐트러트리지 않고 효율적인 대화를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지금 시기에 내가 쉽사리 무시할 수 없는 여러 사안이 생겨나고, 어떤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아까운 시간만 하릴없이 흘러가는 것이 명징하게 체감되는 경험이 잦다. 요즘 나는 친구나 지인을 잘 만나지 않는다. 사람들의 애정어린 조언과 물심양면적 도움이 절실할 때도 분명 있지만, 삶에서 어떤 일들은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일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깨닫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혼자서 끙끙 앓으며 머릿속에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발품을 팔아 이렇게저렇게 해결하고자 애써보는 것이다.


그러다 말할 수 없는 답답함과 함께 혼자서 도저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겠다는 자포자기적 심정이 들면, 아무리 화창한 봄날의 햇살이나 싱그러운 나무, 귀여운 꿀벌들이 주위에 있어도 마치 덩그러니 넓은 로비나 광장 같은 곳에 떨어뜨려져 있는 듯한 느낌이 엄습하는 것이다. 너무나 옹색해져 있는 마음을 따뜻하게 풀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누구라도 같이 한 자리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서 무의미한 이야깃거리나 상념 같은 것이라도 나누고 싶어진다.


그렇게 커피나 한 잔 더 마시기 위해 다시 밖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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