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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ment books Apr 25. 2022

두통이 남긴 것

두통이 남긴 것



1. 등가교환 불가의 두통 속에서


굉장한 두통이 지나갔다.


일년에 한두 번 찾아오는 위염으로 이런 식의 두통을 경험해왔는데, 이번에는 확실히 달랐다.

사흘에 걸쳐 떨어지지 않는, 머리를 깨부수는 듯한 두통이었다. 많은 약을 복용했다. 기본적으로는 장염과 위염약을 처방받아 5일치 복용했다. 타이레놀과 같은 진통제를 대략 20알, 링거로 맞은 진통제도 5통 정도 된다. 이 정도의 복용이 불과 닷새 사이에 있었던 것이다. 도저히 참기 힘든 두통 때문이다.


기본적인 장염과 위염만 해도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나는 위염이 올 때 항상 심한 두통이 따라온다. 단순히 식사를 못해서 힘이 없고, 무언가 식사를 하면 속이 불편한 정도의 문제를 완전히 넘어서 '살기 싫을 정도'의 두통이 찾아오는 것이다.


하루나 그보다 조금 더 오래 가는 두통은 지금껏 여러번 경험했다. 항상 겪을 때마다 이렇게 되뇐다. "내가 한 번 더 커피를 무리하게 하루에 세 잔씩 마시거나, 5분만에 식사하거나, 아니면 탄수화물을 과다 섭취하면 나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그러한 어리석은 습관적 행동은 한 치도 틀림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똑같은 고통과 똑같은 고생, 그리고 똑같은 약물 과다복용이 기다리고 있다.


너무나 미련한 짓이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만 한다. 이번이 내가 보기엔 그때인 듯싶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고통의 강도와 정도의 심각성이 남달랐다. 낮에는 백신주사를 맞았을 때의 그 불편한 두통이 잔존했고, 밤에는 머리를 찌르는 듯한 고통이 간헐적으로 일어나 한두 시간 정도마다 잠에서 깨어났다. 제대로 잠에 들었다는 기분이 들지 않고 두통을 온종일 그대로 받아들이는 기분이다.


이런 악마적인 두통은 발병 3일째에 절정에 이르렀다. 아침부터 도저히 참아낼 수 없는 수준이었다. 회사 출근을 못하고 정상적인 활동이 힘든 것은 물론, 폰에서 정보를 확인하고 메시지를 주고받는 일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두통이 심해졌다. 오전에 일반의원에서 링거를 한 번 맞고, 저녁에는 오히려 상태가 더 안 좋아져서 큰병원의 응급실로 향해 포도당과 진통제를 추가로 더 맞았다.


응급실은 온갖 사유의 고통으로 방문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귀에 이물질이 생겨 한쪽 청각이 거의 손실된 사람, 호스로 이뇨작용을 유도해야 하는 노인, 무슨 사고 때문인지는 몰라도 큰 아픔에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어린아이 소리가 있었다. 슬프게도, 이 모든 현상에 내가 특별한 연민이나 어떤 사유를 할 여유조차 없이(그 자체가 사치다) 내 고통의 해소에 거의 90% 이상의 관심정도가 할애되었다. 내 고통에의 관심을 잊게 할 그 어떤 사건이나 이벤트란 없었다.


이런 생각이 갑자기 스쳐 지나갔다. '내게 이제 아이가 태어나도, 그리고  아이가 울부짖으며 어떤 도움이 필요한 상태에 있어도,  당시에 내게 이런 두통이 있다면 나는 과연 아이에게 온전한  책임을 다할  있을까?' 이런 생각에 갑자기 소름이 끼치고 스스로가 너무나 나약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고작 하루에 아이스 커피  잔씩   동안 처먹은 대가로 두통이나 앓으면서 이런 일로 고민이나 하고 앉아 있다니!


그날 밤까지 나는 제대로 잠에 들지 못했다. 마음속은 이미 파우스트 박사가 되어 악마에게 영혼을 넘겨주고 두통은 거둬지는 거래를 수차례 진행한 상태였다. 더한 거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심지어 나는 비문증까지 이 거래의 품목 중 하나로 상정해봤다. 신이 내게 묻는다. "평생에 걸친 비문증을 거두어주는 대신에, 이런 고통을 매달 한 번씩 경험하게 한다면, 너는 어떻게 할 참이냐?"

주저없이 나는 마음속으로 대답한다. "비문증을 안고 살아가겠습니다."


나흘째, 위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두통이 점차 사라졌다.





2. 순간의 큰 고통, 영원한 잔 고통

  

비문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결국 평생에 걸쳐 시야에 떠다니는 물체를 신경쓰며 신경학적으로 끊이지 않는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별한 수술이나 치료 조치도 없이 그저 감내해야 하는 삶. 그것이 비문증이 가져다주는 가장 큰 고통이다. 어쩌면 내가 자주 비유하는 시지프적인 삶에 가까운 모습이기도 하다. 비문증 자체는 바이러스나 암처럼 사람을 죽이지 못한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계속 소진되며, 미래에의 희망을 갖지 못하게 만들며, 결국 몸과 마음 모두를 쇠약하게 만든다.


이번에 심각한 두통을 겪으면서, 나는 육체를 지니고 있는 한 평생에 걸쳐 얼마나 더한 고통들을 경험하며 살아가야 할지를 한번 생각해봤다. 40대에 내게 닥칠 현상들, 50대에 경험할 수 있는 노안과 류머티즘, 60대 이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당뇨나 암, 70대 이상이 되어 병원 응급실이나 요양병원 침대 위에서 몸 여러 곳에 꽂혀 있는 링거 주사나 각종 호스 같은 것들을 떠올렸다. 고통스럽다. 닥쳐올 고통들 생각에 고통스럽다. 비문증으로 이미 많이 쇠약해진 평소 내 정신에, 이런 고통들을 앞으로 나이들어감에 따라 하나씩 또 경험하거나 극복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에 다시 두통이 찾아올 판이다.


많은 인생의 육체적 고통들은, 결국 그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어떤 고통은 분명 즉각적인 조치가 필요한 성질의 것들이 있다. 며칠 전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이미 마음속으로 부당한 거래를 저질러버렸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데, 실제로 비슷한 거래를 누군가 제안하고 순간적으로 두통을 앗아가줄 수 있었다면, 나는 즉흥적으로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어떤 고통들은 정말로 참기 힘들어서 당장 해소되지 않으면 더 큰 고통이 쓰나미처럼 다가오는 무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인권이 유린되며 신체가 훼손되는 어떤 장소들에서, 불치의 병마와 싸우면서 그런 경험들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고통 속에 있느니, 차라리 이 세상을 떠나는 쪽을 택하고 싶어한다. 인생의 슬픔이다.


어떤 고통들은 이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가벼운 고통인데 평생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고통들이 있을 것이다. 내게는 분명 비문증이다. 이 질병으로 나는 세상을 (실제로 시지각적으로) 달리 보며,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각자에게는 각자 태어난 그 생리대로, 주어진 운명대로 경험해야 할 여러 종류의 고통이 평생을 같이하고 있을 것이다. 형태와 정도가 다를 뿐이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존재할 것이다.   


고통은 언제나 깊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일상과 함께 하는 고통은 느리지만 확실한 형태로 각 사람에게 그에 맞는 철학과 깨달음을 남겨준다. 시지프처럼 이를 감내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결국 빠져나올 수 없는 우울증이나 패배감에 사로잡혀 스스로 삶을 포기할 것이다. 어떤 예기치 못한 (그것이 육체적인 형태든 정신적인 형태든)큰 고통의 사건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당장의 국면을 극복하는 것이 관건일 것이다. 그 순간에 필요한 조치가 제때 주어지지 못한다면 그 시기를 넘지 못하고 바로 무너질 것이다. 존재를 부정하고 싶은 만큼의 큰 고통 앞에서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 두통이 내게 남긴 것은, 비정함이다. 나의 습관들이 원인이 되어 어떤 고통의 결과로 다가오고, 나는 그에 대해 특별히 이겨낼 수 있는 묘수 같은 것은 없다. 그 대가에 맞게끔 정해진 기간, 정해진 고통의 강도, 정해진 불편함, 정해진 시간과 금전적 손해를 온전히 감당하고서야만 이 고통의 시간이 지나가게 된다. 행운은 삶에서 언제나 결핍적이고 특별한 인과관계 법칙에 따라 주기적으로 찾아오지 않는 것 같은데, 고통은 언제나 이유에 따라 움직이고, 항상 제값을 한다.     



<이미지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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