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지 않는 눈, 그리고 마음
1. 쉬지 않는 눈
눈은 쉬지 않는다. 눈꺼풀을 내리덮고 있더라도 눈 자체가 기능을 멈추는 것은 아니다. 바깥이 매우 밝으면 눈을 감더라도 붉은 빛의 얼마간 눈꺼풀을 통과하여 망막까지 이른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눈은 항상 "켜 있다."
시신경이 받아들이는 시각 정보는 뇌로 끊임없이 전달된다. 우리가 하루 중 얻는 정보의 대부분은 시신경을 통해 인지되는 시각 정보들이다. "무엇을 보았다"는 것은 "무엇을 인지했다"와 거의 동일한 표현으로 사용된다. 본 것에 대한 정보 기반으로 우리는 인지하고, 판단하고, 느끼고, 어떤 행동 결정을 내린다. 보는 것의 정도가 내가 누릴 수 있는 행동과 삶의 풍성한 정도와 의미를 좌우한다. 그렇기에 보는 것을 멈출 수 없다.
눈은 쉬지 않는다. 언제나 정보에 갈급하다. 스마트폰은 눈에게 있어서는 분명한 저주다. 모든 틈새의 시간을 스마트폰이 앗아간다. 단순히 긴 시간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는 순간에 적적함을 달래주는 용도의 범위를 이미 넘어섰다. 이제 사람들은 지하철에서 내려 다른 지하철을 타러 갈 때에도, 그리고 내려서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도, 그리고 아예 길을 걸어가면서도 스마트폰을 보면서 다닌다. 사람들과 식사를 하러 갔을 때에도, 음식을 주문하고 식사를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화도 별로 없이 각자의 스마트폰을 들여다 본다. 끊임없이 폰을 통해 정보를 얻는데, 대부분은 시덥잖은 연예 기사이거나 메신저 대화 같은 것들이다. 바로 앞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메신저를 이용해 다른 사람을 불러내어 원거리 소통을 하곤 한다. 영상은 거의 항상 틀어져 있다. 일을 할 때에도 게임 화면이나 스포츠 화면이 재생되고 있는 디스플레이어가 책상 위에 보기 좋게 세팅되어 있다. 거리의 수많은 사이니지, 대중교통 안 광고 디스플레이에서는 끊임없는 숏 영상들이 재생된다.
2. 새로운 것을 찾는 눈
우리 눈은 심심한 풍경에 금세 지루해한다. 길가의 가로수는 우리의 이목을 끌지 않는다. 하늘의 구름의 모양과 움직임에 깊은 감명을 받아 오랜 시간 응시하진 않는다. 빠른 변화를 느낄 수 없고, 흔하디 흔한 잘 아는 풍경이고, 특별한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해서이다.
눈은 자극적인 것을 탐한다. 빠른 화면 전환의 동영상을 즐겨 본다. 이제 우리 눈은 같은 동영상이더라도 '롱테이크'로 찍은 긴 한 컷의 영상에 지루함을 느낀다. 요즘 사람들은 홍상수 영화나, 마틴 스콜세이지의 <좋은 친구들>에서 주인공이 나이트 클럽 뒷문으로 애인과 함께 들어가면서 팁을 주는 모습을 그린 3분짜리 롱테이크 씬을 보면 아주 기겁을 할 것이다. 대화 하나에도 컷이 전환되어 다른 사람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거나, 물이 쏟아지든, 차가 들이닥치든, 문이 갑자기 열리든 심심할 틈 없는 '짜임새 있는' 연출이 계속해서 등장해야 할텐데 말이다.
눈은 계속 신선한 것을 찾는다. 트렌디함을 찾는다. 새로운 레이아웃, 새로운 구성과 연출을 찾는다. 조금이라도 식상하다는 느낌이 들면 다른 것을 찾기 때문에, 모든 마케팅 수단들은 이목을 끌 수 있는 신선한 모습의 시각 자료들로 광고를 만들어낸다. 그래야 소비자들의 시선을 이끌어내고 고정시켜둘 수 있다. 그 어렵게 이끌어낸 시선 또한 금세 다른 경쟁자에게 뺏기게 되겠지만.
3. 욕망하는 눈
눈은 욕망하는 행위의 최전선에 있다. 눈은 자극을 찾는다. 시각적 지향성은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것, 그리고 쾌감을 충족하는 콘텐츠들에 쏠려 있다.
무엇이든지 '봐야만' 그것을 향유한 것이고, 소유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경험은 오로지 눈으로 직접 본것으로만 얻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가장 큰 쾌감은, 무엇보다도 직접 노골적으로 보는 것이다. 바라보는 행위 자체에서 일종의 권력이 발생한다. 바라보는 주체 대비, 바라보는 행위에 노출되는 객체이자 대상들은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피지배자의 위치에 있음을 스스로 느끼게 된다. 노예 경매장에 서 있는 사람들, 노출된 몸으로 관람객들의 눈요깃거리가 되는 사람들, 판옵티콘적 구성 - 공장, 사무실, 거리의 각종 카메라에 노출되고 있는 상황 - 속에서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 되는 모든 사람들은 그 '보여지는' 상황 자체에서 불쾌함을 느낀다. 보는 사람에게는 권력이, 보여지는 사람에게는 수치심이 있다.
욕망의 범위는 무척 넓고, 그 끝을 알 수 없다. 사람들은 이제 탐닉하는 대상을 바라보는 것에서만 쾌락을 느끼지 않고 남들에게 노출되어 보여지는 것에서도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다. 그렇기에 단순히 남을 때리고 괴롭히고 희롱하는 것을 촬영하는 것을 보는 것에서 멈추질 않고, 직접 보여지는 대상이 되어 먹고 자고 무언가 흉내내고 곤란한 상황에 닥치게 된 것을 일부러 보여주는 영상을 스스로 찍어 대중 플랫폼에 업로드 해서 공유하기도 한다. 과시의 욕망은 일반적이다. 예전에는 매체의 기술적 한계성으로 한정적인 범위에서 자신의 부와 권력을 과시할 수밖에 없었던 반면, 이제는 손 안에 플랫폼이 있고 매체가 있어서 언제라도 손쉽게 자신의 과시할 수 있다. 기형적이라고 할만큼 극대화해서 만들어낸 몸매, 슈퍼카 차키, 명품 가방, 해외 5성급 호텔 인피니티풀을 배경으로 아이와 찍은 사진들이 그런 것들이다. 모두들 소소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며 그런 사진들을 올리지만 사실 그 연출의 주연은 따로 있는 것이다. 바로 그들의 능력과 외모이다.
보는 것에서 보여지는 것까지의 모든 욕망들을 드러내는 장소는, 쉬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찾는 눈이 도달하는 마지막 스팟이다. 눈은 심심한 것에서 조금 변화하는 것으로, 조금 변화하는 것에서 신선한 것으로, 신선한 것에서 자극적인 것으로, 자극적인 것에서 극단적인 쾌감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계속 시선을 옮겨가기 마련이다.
이것이 시각의 속성이다.
4. 쉬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찾고, 욕망하는 마음
눈은 마음의 창인 듯싶다. 눈이 가는 곳은 결국 정신이 가는 곳이다. 시각의 그 섬세하면서도 자극에 취약한 특성이, 우리의 마음 가는대로의 행동의 직접적인 동인, 도화선이 된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어떤 대상을 노골적으로 응시할 수 있다. 눈은 쉽게 떠진다. 쉽게 응시할 수 있다. 실눈처럼 뜬 눈이라도, 눈을 통해 대략의 정보를 모두 얻을 수 있다. 빛의 밝기와 주변 환경, 바라보는 대상의 움직임의 대략이 정보가 되어 들어온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정보는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시지각적 정보로 쉽게 얻을 수 있다. 그렇기에 눈은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충동과 생각 따위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이고 크게 받는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쉽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시각이 주는 욕망의 즉흥적인 해소의 특성이다. 바라보는 것은 큰 인내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원하는 정보를 바로 얻을 수 있다. 어떤 고심을 하기 전에, 찰나의 생각을 하기도 전에 우리는 무언가를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면 되는" 것으로 끝내버리는 경우가 많다. 더 많은 생각과 사고를 하지 않고, 그저 즉흥적인 시선두기로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고 곧바로 다른 볼거리를 찾아 넘어갈 수 있다. 거기에는 기다림도, 사색도, 회한도, 반성도, 은근한 감미로움도 없다.
현대사회가 제공하는 시각 정보의 분량과 자극의 정도가 분명히 이전 10년 전, 20년 전, 50년 전의 경우와는 무척이나 다른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눈을 통해 부지불식간에 들어오는 정보들의 성격과 종류에 화를 낼 일은 아닌 것이다. 무엇을 바라볼지, 무엇을 보고 생각하고 행동할지에 대한 각자의 수련과 사고가 요청된다. 눈이 쉴 수 있고 새롭고 자극적인 것을 좇느라 정신이 없는 이유는, 우리네 삶과 우리의 마음 상태가 가만히 있지 못하는 강박증 환자와 같은 상태에 파묻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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