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징징거리지 않는다. 그저 쓸 뿐이다.
퇴원한 지 거의 한 달이 되어간다. 집에 오면 바로 글부터 써야지 했는데, 그럴 수 없었다. 몸이 생각대로 움직이긴커녕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젓가락질도 못했다. 세상에 손으로 무언갈 하는데 팔과 손가락에 그렇게 섬세하고 많은 소근육이 사용되는 줄은, 사람의 몸이 이렇게 정교하게 프로그래밍되어있는지는
몸이 상해 보고야 알았다.
이렇게 누워도 저렇게 누워도 갈비뼈가 아파 기침이 나왔다. 어깨 아래부터 손가락을 아예 못썼다. 식사는 포크질로, 물은 빨대로 겨우 마시며 목숨을 부지했다. 이 마당에 무슨 타자질이람. 손도 손이지만 사실 더 큰 문제는 다른데 있었다. 글을 쓸 수 있는 CPU가 완벽히 망가졌었다. 사고 회로가 고장나버리니 답답해도 말도 못 하고 글도 쓸 수 없었다. 생각한 대로 말이 나오지 않아 짜증만 늘었다. 거짓말이다. 실은 생각 자체가 불가능했다. 말 못 하는 어린애처럼 할 수 있는 거라곤 성질내는 것뿐이었다. 응급의학과 주치의 선생님은 심장이 멈추면서 뇌에 산소 공급이 중지되니 타격이 클 거라고 하셨다. 걷는 것도, 손의 힘도 일상생활을 하면(서 재활을 꾸준히 한단 전제 하) 1-2개월이면 돌아오겠지만
잃어버린 그 사이의 기억이나, 언어 장애는 시간이 꽤 걸릴 수도 있다고 하셨다.
11월 29일 월요일 5시경.
곡 작업 도중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심정지로 의식을 잃었다.
심정지가 일어난 지 3분만 되어도 신체 일부가 동작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5분만 되어도 깨어날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내가 혼자 사는 자취생이라면 어땠을까. 잠깐 일정이 있어 외출했던 남자 친구가 돌아왔을 때가 5시경이었다. 내게 심정지가 발생하고부터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조차 모른다. 내가 아는 거라곤 - 쓰러져있는 나를 돌아온 남자 친구가 발견했고, 119에 전화해 앰뷸런스가 오기까지 CPR을 죽어라 했다는 것과, 가까운 대병에 도착해 코로나 검사를 하고 또 얼마의
시간을 보낸뒤 음성이란 결과를 받고 나서야 겨우 응급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때까지 계속 CPR을 멈추지 않아 다행히 모두에게 슬픈 소식을 전할 확률이 현저히 낮아졌다는 것 정도의 이야기만 ‘들어서’ 알고 있다. (묘사는 최대한 삼갔다. 듣기에도 너무 자극적인 일들이 많았다.)
집 근처 대병 응급실로 이송되긴 했지만 내 상황에 정밀 검사가 필요한데 장비가 없다고 했다. 전원을 해야 했다. 코로나 시국이 맞물려 응급실 병상이 없었다. 결국 서울의 응급실이 나지 않아 인천까지 갔다. 전원을 하는데만 5시간이 넘게 걸렸다고 했다.
투쟁 아닌 생이 어딨겠냐만은 - 2018년부터 버티듯 살아온 삶에 2021년 11월, 가혹함이 정점을 찍었다. 어쩌면 이 심정지는 아픈 게 무서워 생을 마감할 용기가 없었던 내가 해야 할 일을 심장이 대신 해준 느낌이었다. 혼수상태에선 적어도 아픔을 느낄 수 없으니. 그렇게 대신. 스스로 뛰기를 멈추는 것으로
갈피를 못 잡는 주인 대신 노를 저어준 것 같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깨어나버렸고 깨어나니 다시 생애 한 복판에 서있다.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데 실패했고, 많은 주변인에게 상처 주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인천에 있는 한 대병원의 일반 병동이었다. 쓰러진 날 이후로 꼬박 9일이 지나 있었다. 본가가 인천이라, 한동안은 내가 왜 인천에 있는지도 의심하지 않았다. 왜 병원에 있는지, 환자복을 입고 매일 두 번씩 병상을 밀고 이리저리 검사실로 옮겨 다니는 이 상황에 모든 것이 의문이어야 하는 게 맞는데 나는 아무에게도 ‘왜?’란 질문을 하지 않았다. 왜? 그것조차 생각이 없었으니까.
나는 삼시세끼 거르지도 않고 오는 병원밥과 진료, 검사 등을 멍하니 앉거나 누워서 해내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러다 깬 나도 비로소 의식을 찾으면서 보호자인 남자 친구에게 이런저런 걸 묻기 시작했다.
- 오빠랑 나랑 둘 다 병원이면 돈은 어떻게 벌어?
- 너 회사 관뒀어. 8월에. 그리고 나는 프리랜서잖아.
- 아. 결국 관뒀구나.
- 어떻게 된 거야?
- 중환자실에서도 물어봤고 알려줬는데 기억이 안 나나 보구나.
짧게는 최근 6개월을 통째로, 길게는 3년 사이의 기억을 띄엄띄엄 잃었다. 5일을 중환자실에서 보호자 없이 집중치료를 받고, 거기서 의식이 회복돼 일반병동으로 옮긴 지 나흘째 되는 날이라고 했다. 쓰러지면서 목이 꺾인 채 벽에 부딪혀 외상과 내상이 동반됐다. 목이 다 상해 목소리를 내려해도 쇳소리만 났다. 일어나 앉으려면 맥 없는 병아리처럼 목이 떨어져 깁스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손과 발은 이제 많이 회복됐지만 목과 갈비뼈는 지금도 아프다.) 나흘간의 일반병동은 의식이 회복 되어 옮겼다고는 했지만 나는 그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깨우면 잠깐 일어나 대답하고 다시 잠드는 게 일상이라고 했다. 뭐라 설명하고 써야 할지 사실 지금도 모르겠다. 의식은 돌아왔지만 기억은 못하는 시기와, 의식과 기억 모두 또렷한 퇴원 전 마지막 이틀. 그 나뉜 시기를 뭐라 칭해야 할지 난감하다.
퇴원하고 나서는 외래 진료 두 번을 제외하고는 외부인과의 접촉도 없었다. 스스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공황장애와 수면장애도 사라졌다. 매일 뭘 먹을까 생각하는 게 하루치 생각의 전부.
사회와 단절되었으니 사회 공포가 사라지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퇴원하던 날까지도 병실 앞 화장실을 걸어가지 못해 휠체어로 거동했다. 퇴원 후 거동이 불편할 것을 대비해 휠체어를 대여한 게 무색할 만큼 2주 만에 6 천보를 돌파했다. 대여한 휠체어는 외래 진료 갔을 때, 환자 코스프레하느라 딱 한번 쓰고 아직도 차 트렁크에 방치되어 있다. 1월 1일 새해에는 내가 힘들어할 때마다 내 멱살을 잡고 삶을 이어가도록 캐리해준 가수의 콘서트를 보러 공연장에 다녀왔고, 이틀 전에는 8 천보를 걸었다. 심장이 멈춘 것 치고는 놀라운 회복력. 집에 돌아온지 3주가 되어서야 손 끝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는데, 아직 카페에서 커피를 받아 트레이를 나르는 등의 일은 어렵다. 테이크아웃이 아니라면 머그컵에 음료를 담아주는 요즘, 잔이든 트레이든 내가 받아 자리로 돌아가는 그 짧은 시간에도 손이나 걸음이 덜덜 떨려 잔을 엎고는 한다. 하지만 이조차 회복의 과정이라 생각한다. 최대한 감각에 집중하다 보니 조금씩 좋아지는 게 보인다.
늘 글을 1) 쓰고 싶었고, 2) 잘 쓰고 싶었다. 그런데 한 달 간은 욕망이나 답답함을 포함한 감정이랄 게 전혀 없었다. 살면서 처음 겪어본 일이었다. 공황장애 약을 먹으면서도 머릿속은 늘 시끄러웠다. 그런데 심정지 한번 왔다 가니 머릿속이 고요해졌다. 생각이 없으면 글도 나오지 않는데, 사실상 창작자로서는 끝난 삶이나 다름없다. 글은 여전히 쓰고 싶지만 지금의 이 고요함이 좋다.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차라리 고통 없이 창작도 하지 않는 삶을 택하고 싶을 정도. 이때껏 살면서 처음으로.
어쩌면 나는 머릿속에 생각이 너무 많아 글로 배설하고 싶은 욕구가 남들에 비해 엄청 커진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딱 한 달이 되니 조금씩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기대보단 늦었지만 예상보다는 빨랐다. 적어도 반년 정도는 입체적인 사고도, 글도 쓸 수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또 이렇게
불사조처럼 일어나 타이핑을 하고 있다. 이게 무슨 인소 재질의 제목과 스토리인가 싶지만, 놀랍게도 전부 실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