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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수안 Aug 17. 2022

지겨운 삶은 지질하게도 계속되고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야지. 사람이 살았으면 뭐라도 해야지. 이 말을 퇴원하고 나서부터 주문처럼 외운다. 죽는데도 실패하고 삶으로 돌아온 나는. 그럼에도 살아서. 다시 직장을 구하고, 다시 사람들과 부대끼고, 다시 스트레스를 받고, 다시 일을 하고, 다시 웃고, 다시 돈을 벌고. 죽음을 농담처럼 소비하고, 그렇게 여느 사람들처럼 세상에 뒤섞여 살아간다.


삶이란 단어는 살아있음이란 뜻.

삶이란 단어는 사람과 닮았다.


사람이기에 살아있는 걸까, 살아있기에 사람인 걸까.

그렇다면 나는 살아있는 걸까, 죽어있는 걸까. 숨을 쉬고 있으면 다 살아있는 걸까.




/



지혜지 못 볼 뻔했네. 


그로부터 지루한 8개월이 지났다. 죽음에서 살아 돌아오고, 이승의 차디찬 겨울을 꼼짝없이 몸으로 받아내고, 다시 삶에 적응하고, 재활을 하느라 한동안 친구들을 못 만났다. 계절은 겨울에서 봄으로, 봄에서 비가 퍼붓는 여름으로 변했다. 얼어 죽겠다는 말은 쪄죽겠다로 갈음된다. 인스타로 죽을 뻔 한 소식을 전한 바람에 의도치 않게 어그로를 끌었다. '지혜지 글 봤어? 죽을 뻔했다던데.' 친구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얘기였는데 속사정을 아는 이가 없었다. 너의 좋은 점은 그거였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는 것. 직성이 풀릴 때까지 묻고 또 묻는 것. 나는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털어놓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터부시 되는 말. 살면서 딱히 얘기해본 적 없기에 듣는 이마다 반응이 달라지는 말. 몇 번 꺼냈다가도, 듣는 이가 기어이 할 말을 잃고는 짧게 다행이네, 회피해버리는 반응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너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꺼내도록 이끌어주는 경청자의 역할. 어쩌면 지금 내게 필요하던 사람. 그래서 덤덤하게 나의 대서사를 풀어놓았다. 그것도 많이 축약한 거긴 하지만. 하여튼 너는 내 일장연설을 듣고 짧게 소감 했다. 


'너를 10년을 넘게 알고 지냈는데도 사실은 모르는 게 더 많았네.'

'그치. 너무 딥해서 꺼낼 일이 없었지. 괜히 술맛만 떨어지잖아.'


아, 술맛 떨어지는 나의 인생사. 궁금한 걸 다 해결했는지 또 짧은 소감. '이제 너의 퍼즐이 맞춰진다.' 그 말이 좋았다. 너는. 나를 단 한 번도 너의 식대로 평가하거나 분석하지 않는 사람이어서. 왜 그랬어. 라든지, 그래도 다행이다. 같은 핀트가 나가는 말은 일절 하지 않고. 그저 담백한 감회뿐이어서. 너를 안 13년 동안은 그랬다. 그래서 너였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렇게 바닥까지 전부 기꺼이 보여줄 수 있는 상대가. 너는 내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나를 평가하거나 질타하거나 분석하려고 하지 않으니까. 호들갑도 떨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들어줄 뿐이니까.  그래서 너에게는 진실을 말하고 싶었다. 속으로는 놀라거나 충격을 받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티 내지 않고, 대화 소재를 자신으로 전환하지도 않고 오롯한 경청의 자세. 제법 딥하기에 깊게 묻어둔 내 진실을 꺼내게 하는 사람은 그런 류의 사람이다. 시니컬할 정도로 담백하게 제 소감만을 말하면서 주체를 나로 지켜주는 사람. 애초에 가십거리처럼 다루거나, 안 좋은 일을 듣고 싶어 하지 조차 않는 사람에겐 굳이 꺼내지도 않는 내 서사를 그래서 네 앞에선 꺼낼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 자리는 편했다. 13년 세월의 힘이기도 하지. 어쩌면 이 인연을 13년이나 지켜낼 수 있던 건 우리의 힘이기도 하지. 우리라서. 다른 이 아닌 우리만의 케미니까. 너의 대화방식이 그래서 좋다. 나를 늘 솔직하게. 어디에서도 내놓지 못한 것들을 덤덤하게 들어줌으로써 내 문제는 순간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은 너의 능력이다. 너는 섬세하고 사려 깊다. '이제 힘들어하지 마. 지혜지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 예뻐하는데.' 그 한마디에 우리의 철없던 시절이 별똥별처럼 빛났다 사라진다. 너는 그날 이후로 내 이름을 꼭 성까지 붙여 세 글자로 말했다. 그 감정도 분명 사랑이었지. 사랑이었다고 믿어. 다만 미약했을 뿐. 너와 나는 사랑을 했어. 이성애를 떠나 인간애로서. 그러니 네가 첫 이별에 멘탈 터졌을 때 너를 케어하겠다고 초행인 타지까지 널 보러 달려갔고, 내 병이 재발했을 때 너는 소중한 군대 휴가를 내 병실을 지키는데에 다 썼지. 그리고 네가 마침내 복학해 후배와 사귄다 했을 때 나는 되지도 않는 기싸움을 걸었던 거겠지. 그래서 네가 사랑이란 단어에 문득 말 끝을 흐리고 단어 선택을 다시 한 것도 평소의 내가 다른 사람과 대화했다면 부리나케 걸고넘어져 놀렸겠지만 그러지 않았어. 그 세월을 기억하니까. 너는 자루가 나에 대해 더 많이 안다고 말했지만 오해야. 자루는 원래 뻠삥을 잘해. 내가 실로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눈 건 원래부터 너밖에 없었어. 너의 소통방식은 정말 나이스 하거든. 평가하지 않고 비난이나 분석도 하지 않고, 이해해보려고 하는 것. 그게 너의 가장 큰 장점이라서 나는 무슨 일이 생기면 늘 너에게 털어놓곤 했었어. 너는 나를 좋아했고 나는 너를 동생처럼 챙기면서도 심적으론 의지했어. 그것도 많이. 의지할 수 없다면 이토록 무거운 말을 꺼낼 수나 있었겠니. 다른 애들처럼 적당히 아팠다가 이제는 괜찮아 란 말로 정리해버릴 수 있는 일을 말이야.

너와 대화하며 나는 문득 너는 정말 좋은 아빠가 될 거라 생각했어. 육아와 일이 고되 많이 지친 모습이었지만 그럼에도 뭐라도 해내는 네 모습을 보며 존경하고. 나도 다시 살아낼 동기부여를 얻었어. 각자의 삶이 고난의 연속이더라도,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야지. 살아있으니까. 살았으면 뭐라도 해야지.


너는 좋은 아빠가 될 거야. 평가가 싫다던 내가 정작 널 평가하고 있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이건 평가가 아닌 사실이니까.

오랜만에 만나 짧은 시간 동안 묵직한 얘기를 나눠버렸으니 헤어지고 머리깨나 아프겠다 했다. 미안해하진 않을래. 너의 소통방식이 너무 나이스 해서 내 모든 걸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는 걸. 오랜만에 거짓 없이 솔직한 대화를 해서. 내 마음도 해방감을 느끼고, 한결 후련해졌다.


너는 여전히 우리 과 동기 중 가장 마음이 쓰이는 내 막냇동생인걸. 이성애가 아니라 인류애로서 너를 사랑해. 이상하지. 사람이 살고 죽는 데는 이유가 없어서 지금도 사람이 죽고 또 태어나는데, 사랑은 터무니없게 낭만적이야. 삶은 지겨운데 참 지질하게도 이어지고.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가자. 이렇게 가끔 만나 맥주도 마시고. 다음번엔 조금 더 가벼운 주제로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기왕이면 이승에서. 죽지 말고. 살아서. 사람은 삶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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