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내리는 고모령
석수였던 아버지는 여느 노동자들처럼 비오는 날이 공치는 날이었다.
서대문구 홍은 3동 산 11번지. 1970년대 중후반 우리 식구는 채석장에 달린 단칸 방에 살았다. 비오는 날, 이 옹색한 살림집 마당은 돈을 쫓아 산으로 올라온 석공이며 등짐 인부들의 목로주점이 되곤했다. 빨래줄 처럼 마당을 가로 지른 전선 끝에 위태롭게 매달린 백열등이 불을 밝히면 젊은 인부가 기타를 뜯고 아버지는 늘 이 곡을 주문했었다.
난 이 노래가 너무 싫었다. 아빠를 비롯해 몸뚱이로 먹고사는 아저씨들의 추레한 여흥이 더없이 청승맞고 구질구질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곡이 그곡, 똑같은 뽕짝을 수십곡씩 부르며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기 싫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비오는 날이면 늘 패배감에 쩔어 있는 아버지를 만나야 한다는 건 열 살 어린아이에겐 가혹한 일었었으니.
그 때 그 노래, 폄하하고 외면했던 노래가 마음에 다가온건 그 시절 아버지 나이가 됐을 쯤인가 보다. 내 아버지가 이 노래를 들으며 왜 눈가가 붉어졌는지 이해 되는 게 아니라 그냥 울림이 왔다. 귀를 막고 업신여겼던 엔카풍 기타리프는 물론 가사까지 완벽하게 외우고 있는 나를 보며 놀라고 그 선율을 음미하며 왈칵 눈물 떨구는 모습에 더 놀란다.
내 아버지의 노래였던 비내리는 고모령, 하루벌어 하루 살던 고단한 노동자가 공치는 하루 니 설움 내 설움을 담아 풀던 노래는 이제 나의 소울뮤직이 되었다.
장사익과 김광석의 협연을 보면서 문득 아버지께 사과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리구리 가요무대 좀 그만 보면 안되냐고.. 청승맞은 뽕짝 테이프는 왜 자꾸 사들이냐고..싸가지 없게 대들고 못되게 굴어 죄송하다고.. 그땐 너무 어렸다고 이해해 달라고 말이다. 그러나 내 사과는 20년 지각, 늦어도 너무 늦었고 아버지는 오십 초반 빨라도 너무 빨리 세상과 이별하셨다.
그나저나 아버지가 장사익을 보시면 뭐라 하실까?
" 기타는 그럭저럭 치지만 카수가 영~~ㅉㅉㅉ 좋은 노래 배려버렸네~ "
나와는 한번도 의견일치가 없었던 분이니 어깃장을 놓았을 게 분명하지만 유투브 같이보며 병맥주는 같이 했을텐데.. 아쉽고 또 아쉽다.
참. 아빠와 의견일치가 있긴 했다. 술은 반드시 홀수로 시키고 반주는 술이 아니라 약이라는 거.. 아! 이건 의견이 아니라 진리구나?? ㅎㅎㅎ
아빠 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