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강릉의 추억
2년 전 어느 날, 시장에 산딸기가 잔뜩 나오고 자두가 슬슬 나오기 시작할 무렵, 훌쩍 강릉에 다녀왔다. 마음이 답답하고 사람이 불편했다. 혼자 있고 싶었다. 그리고 편평하고 넓은 바다가 보고 싶었다. 바다에서 해가 뜨는 것도 보고 싶었다. 그러면 이 불확실하고 불안한 마음에 뭔가 답을 얻게 될지도 몰라. 아니 무언가를 조금이라도 두고 오기라도 했으면.
떠나기 직전에 게스트 하우스를 1박 예약했다. 바닷가 바로 앞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다. 강릉에 도착해서 시장을 돌아다니고 칼국수를 먹고, 영화관을 기웃거리고, 팥빙수를 한 그릇 먹은 다음 산딸기를 한 봉지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게스트하우스에서 H를 만났다. 그녀와 나는 같은 방이었다. 내가 짐을 놓느라 부스럭 거리는 바람에 낮잠을 자고 있던 H를 깨우고 말았다. 그녀와 산딸기 한 봉지를 씻어서 나눠먹었다. H는 말수가 많지도, 그렇다고 적지도 않았다. 잠이 아직 덜 깬 건가 싶은 그녀의 차분한 표정은 알고 보니 원래 그런 거였다. H는 강릉을 잘 알았다. 산딸기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같이 커피도 마시고 저녁도 먹으러 갔다. 사람이 불편하고 심신이 지쳐서, 혼자 있고 싶어서 한 여행이었는데 그녀와 계속 함께하게 됐다. 함께 배불리 물회를 먹고, 음악을 나눠 듣고, 서로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H도 나도, 그동안 우리가 좋아하는 걸 맘껏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렇게 내가 나의 이야기를 길게 한 적이 언젠가 싶었다. 아니, 누군가 내 이야기를 오래오래 들어준 적이 언젠가 싶었다. 어느덧 나는 H에게 아무한테도 하지 않은 이야기까지 하고 있었다. 우리는 밤새 바닷가에 있었다. 옷을 있는 대로 껴입고, H가 고른 음악을 들으면서 맥주를 홀짝였다. 가만히 있고 싶으면 가만히 있고, 이야기가 하고 싶으면 이야기를 했다. H가 화장실에 가느라 잠깐 자리를 비우면 혼자 남은 몇 분이 허전했다. 그렇게 처음 보는 사람과 모래톱에 앉아 까만 바다를 보며 밤을 지새웠다. 저 멀리 바다의 끝에는 반짝이는 불빛이 있었다. 그것은 떨어진 별은 아니고 고기잡이 배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짭쪼름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노랫소리 섞인 파도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그 날은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이었다. 그래서 드라마틱한 일출은 없었다. 네다섯 시간 기다린 일출은 그저 아주 까맣던 세상이 점점 그 모습을 찾는 일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눈 앞이 조금씩, 그러다 환히 보이는 일이었다. 산딸기처럼 탱글탱글 붉은 태양은 그 아침 어디에도 없었다.
"에잇! 이게 뭐야."
라고 투덜대면서 엉덩이를 털며 일어섰지만 마음만은 이상하게 충만했다. 오히려 명징한 일출보다 흐린 아침이 반가웠다. 어쨌든 나는 어둠을 통과했다. 떠오르는 태양이 보이지 않는 흐린 아침도 새 날이었다. 그 사실에 나는 안심이 되었다.
그 날 나는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H는 내가 버스 타는 곳까지 배웅해주었다. 또 만나자고, 강릉에서 잘 지내다 가라고 인사를 했다. 나는 어쩌면 자꾸 혼자이고 싶어 하는 내가 걱정되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잔잔한 표정으로 나한테 손 흔들어주는 H를 보니 또 안심이 되었다.
오늘 H로부터 소포가 왔다. 엄청 무거운 상자 하나가. 그 안에는 국수가 한가득 들어있다. 그녀가 근무하는 회사 제품이다. 가끔 메시지를 주고받는 H는 잊지 않고 내게 국수를 챙겨준다. 정말 그녀가 보내준 국수를 다 먹을 때쯤이면 새로운 국수 한 상자가 도착한다. 귀신같은 타이밍이다.
오늘 저녁 메뉴는 비빔국수다. 국수를 끓여서 찬물에 비벼 녹말기를 씻어낸다. 손에 감기는 국수가닥들이 싱싱하다. 여러 가닥 국수가 한데 어우러져 맛있는 식사가 된다.
호로록호로록 면발이 쫄깃쫄깃하다. 나의 부엌찬장은 또 다시 국수 풍년. 나의 배도 마음도 든든하다. 함께여서 통과할 수 있었던 깜깜한 어둠이 떠올라, 또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