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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의권 Jun 16. 2017

Storytelling

 진정한  삶은  이야기로.  2017. 6.24

오픽(OPIc)이라는 영어 시험이 있다. 영어 구술능력에 대한 시험인데 인터뷰를 하는 형식으로 컴퓨터 앞에서 헤드셋을 끼고 질문을 받으면 그것에 맞게 영어로 뭔가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시험 방식에서도 나름의 배려를 해주는 것이 본시험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자기 관심 분야나 삶의 관련된 영역들을 선택하고 그것에 따라 질문들이 나온다. 예를 들면 학생인지, 직장인인지, 운동을 한다면 어떤 종목을 좋아하는지, 취미는 뭔지, 가족이 어떠한지 등을 미리 입력하는 것이다.


몇 년 전에 이 시험 관련해서 어떤 '사태' 가 발생했다고 한다. 그것은 어떤 질문에 거의 같은 내용 아니 문장까지도 같은 답변들이 나와서 시험 주최 측이 관련된 수험자들의 등급을 하향 조정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한국의 오픽 시험 관련 학원 등에 공문을 보낸 것이다. 이른바 족보를 암기해서 시험 본 결과에 대한 대응인 것이다.

이해는 된다. 다양한 상황에서 이야기가 술술 나오겠는가? 그것도 영어로.


내가 지난 11월에 이 시험을 볼 때도 곤란한 상황이 발생했다. 지난 5년간 해외에서 일하면서 영어를 썼으니  등급 올려야 되는데... 하는 욕심에 가장 도전적인 유형을 골라 들어갔다. 영역 선택 중에 아이들이 있고 독서가 취미라고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동일 상황 3단 연속 질문의 2단까지는 무난하게 지나갔는데, 마지막 단계에서 '당신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상황에서 아이들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말해보라, 그때가 언제였고, 어떤 반응이었고, 어떻게 대응했는가...' 갑자기 말 그대로 멘붕이 왔다. 이미 녹음이 시작된 상황에서 난 "이거 정말 어려운 상황이군요. 음... 아 한 가지 기억난다" 이렇게 운을 떼고 들어갔다. 

그 기억이 났다.

아이들과 집에서 큐티를 하는데, 구약의 어느 부분이 이었다. 첫째 놈이 갑자기 "아빠 창녀가 뭐야?" 그때도 멘붕이었다. 진땀 빼가며 설명했던 기억이 났다. 그 상황, 그 곤란한 상황을 그리고 그걸 어떻게 설명했는지를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시험 결과는 좋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시험은 실제 생각하고 느끼는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좋다고 한다. 예를 들면 전화 통화하는 시추에이션이면 '따릉 따릉..' 식의 소리를 직접 내가면서 시험을 치르기도 한다고 한다.


백수로 노는 동안에 영어공부나 하자 싶어 학원 교실에 들어갔을 때 대부분 20,30대 팔팔한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 주눅이 들었는데, 막상 말하기 수업 시간이 돼서 선생님이 질문을 던지면, 그 팔팔한 친구들이 뭔가 골똘히 생각은 하는데 할 말을 못 하는 것이다. 

나중에 보니 그게 영어로 말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이야깃거리를 쉽게 못 찾는 것이다. 젊은 친구들이 이야기를 꾸며내려고 해도 뭔가 원자재가 있어야 될 텐데 그것도 부족해 보였다. 


지난여름 나를 날씨도 더운데 더 힘들게 한 것은 둘째 딸의 수학 문제 풀이였다. 요즘 초등학교 수학은 이른바 '스토리텔링'으로 상황을 부여하고 그 속에서 문제를 풀어야 한다. 그런데, 애가 그 상황을 이해 못하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사과 한 상자를 주셨는데, 그 사과로 10개 묶음 3개를 만들고 4개가 남았어요. 그 상자에는 모두 몇 개의 사과가 있었을까요?' 이 문제를 이해를 못한다. 미칠 노릇이었다.

문제를 푸는 동안에 아이의 분위기를 보니, 이게 머리가 나쁜 것이 아니고 그냥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 것이다.

살고 있는 아파트에는 목요일마다 장터가 열린다. 거기에 각종 군것질 거리도 있는데, 둘째 딸이 좋아하는 것 중의 하나가 찰떡 도넛이다. 그걸 파는 가게에서 엄마와 같이 가서 6개를 사 왔는데, 갑자기 가족 모두가 외출하게 되어서 온 가족이 나눠먹게 되었다. 문제를 냈다. " 이 도넛을 아빠가 2개 먹으려다가 1개만 먹었는데, 먹보 오빠가 재빨리 2개 먹고 엄마가 1개 먹으면 인서는 몇 개를 먹을 수 있을까요? " " 2개지" 쉽게 말한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 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예수가 암탉과 그 새끼의 모습의 이미지를 굳이 인용한 이유가 뭘까. 어디선가 읽은 것 같다. 어떤 분이 닭장에 불이 붙은 걸 보았는데,  그 와중에 그 속의 암탉이 타 죽었는데 죽은 어미 닭의 날개를 들추니 새끼들이 그 속에서 기어 나오더란다. 아마 예수도 어린 시절 어느 때 이것과 비슷한 뭔가를 보지 않았을까? 

예수의 수많은 주옥같은 스토리텔링은 정말 몸으로 격은 무언가를 바탕에 깔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야기는 논리보다 더 공감하기 쉽다. 그 공감은 사람과의 관계를 만들어 간다. 관계는 또 다른 더 깊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한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그 삶 자체이지 않을까 싶다.


논술보다 이야기가 더 '대접'받는 세상에서 살아야 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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