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경복 Jan 08. 2023

#익숙하지 않은 것들을 마주하는 것, 여행지에서

낯선 것에 겁먹지 않고 싶어서

몇 주 벼르다가 머리카락을 좀 잘랐다. 가위로 싹둑싹둑 자르는 소리, 오랜 시간 나를 만들어준 머리카락이 바닥에 쌓여있는 그 순간, 아깝다기보다 마음이 후련했다. 긴 머리로 머리가 무겁게 느껴졌다는 이유가 제일 컸지만, 커트에 의미 있는 부제를 굳이 붙이자면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기'가 그 큰 이유였다. 뭘 해도 머리를 묶고 있으니 나의 스타일은 1년 거의 변화가 없어서 바꿔보고 싶었다. 긴 단발 정도 되는 내 모습, 헤어스타일 하나 조금 바꿨다고 거울 속 내 모습이 익숙하지가 않다. 다시 자꾸 묶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고무줄들을 치우고 이 모습에 적응 중이다. 


짧지만, 며칠 여행 중이다. 어디를 가야겠다고 마음은 늘 바라지만, 떠나 지지 않은데 떠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건 남편에게 주어진 회사에서 준 휴가라는 이름 때문 같다. 여름휴가, 겨울 휴가. 

그때마다 우리들은 여행지를 어디로 갈지 결정했다. 그리고 그 여행지를 정했던 건 늘 나였다는 것을 이번에 다시금 느꼈다. 남편이 나에게 늘 "어디가 가고 싶어?"라고 물었고 나는 그 물음에 선택지를 내밀었다. 

여행지를 가고 싶어서 갔던 적보다 어디라도 떠나고 싶은 생각에 도착지는 익숙한 강릉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이번에도 다시 묻길래 안 가본 데를 가보고 싶었다. 한참 할 일들에 치여 여행지를 고르는 일에 시간을 쓰지 않았고, 강릉의 반대편으로 향하고 싶어서 고른 것이 여수 밤바다 노래가 떠올랐다는 이유로 지금 그 선택한 곳에 와 있다. 이 소소한 여행지를 정하는 것에도 고르고 결정하면 그 자리가 곧 보내는 시간이 된다는 것에 마음이 머물렀다. 

익숙한 선택을 하면 익숙한 자리가 되고, 낯선 자리를 향해 가면 그곳이 새로운 시간이 되는 일상. 


여수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때는 이십 대이고 지금은 곱빼기로 나이를 먹어 사십 대가 되어 찾아갔다. 

그 첫 여수 여행이 잊히지 않는 건, 평택에서 여수까지 기차를 타고 오는데 너무 오래 앉아있어서 허리가 아팠다는 것과 동생이 어떤 일로 힘들어해서 같이 떠나자고 했던 이유가 새록새록 이곳에서 생각났다. 그날 우리가 먹었던 고등어조림과 비가 왔지만, 떠나왔다는 생각에 기분 좋아서 우산을 쓰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던 자매의 모습들이 눈앞에 영화처럼 스쳐갔다. 

아프고 불투명한 미래였는데 이렇게 두 배의 나이에서 그때를 바라보니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아도 될 앞날이었다. 많은 상심도 질퍽함도 방황도 있었지만, 둘 다 결혼을 했고 엄마가 되었다는 변화들이 두 번 태어난 듯 새롭다. 나는 햇병아리긴 하지만 작가가 되었고, 동생은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와 일본어라는 자신만의 세상이 만들어진 채로 시간을 지내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감격스럽다. 뭉클하다, 고맙다, 감사하다, 다행스럽다, 기쁘다, 신비하다, 놀랍다는 감정의 언어들로 수를 놓고 싶을 정도다.  


일상의 단상.

헤어스타일도 여행지도 그냥 스쳐갈 하나일 뿐인데, 이 마음이 차올라서 적어놓고 싶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을 마주하는 마음. 

2023년 새로운 해가 되어서 새롭게 시작하는 시간들이지만, 나는 몸에 익은 모든 것이 더 좋아서 그 자리를 잘 바꾸지 않는 나를 이참에 자세히 보게 된다. 단골 음식점, 단골 여행지, 단골 옷집, 단골로 수업하는 곳, 단골 집 밥 메뉴, 단골로 듣는 라디오, 단골처럼 만나는 사람들, 단골 여행지, 단골로 읽는 종류의 책들, 단골 헤어스타일, 단골 옷 스타일, 단골로 만나는 사람들.. 다양한 세상에서 나에게는 단골이 주는 편안함에 익숙해졌다. 

'단골이 뭐 어때서' 이런 말이 불쑥 고개를 내밀지만, 이 중에서는 분명 새로운 곳을 향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것처럼, 가보지 않으면 못 본 것처럼, 입어보지 않으면 어울린다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먹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맛처럼 새로움의 한도를 늘려가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답다고 스스로 만들어놓은 것들이 나다움을 평생 딱 한 장의 그림만 그려놓은 것처럼 살아가야 할 것인가 묻게 된다. 다른 색깔을 입히고 다른 자리에 가져놓은 것만으로도 그림의 분위기가 바뀌고 생각 외로 만족스럽게 보일 때처럼 일상도 그러지 않을까. 

그런데 이렇게 적으면서도 모르는 미래는 늘 두렵다. 해보지 않은 것은 늘 불편하다. 

두렵고 불편하면서도 해야 하는 것일까 생각하면 어렵기도 하지만, 오늘 입을 옷 색깔이 검정이면 내일은 흰 셔츠를 골라서 입는 것처럼 가벼운 선택을 그때마다 한 번씩은 해보자는 마음으로 다듬어본다. 


"가보지 않은 곳도 한 번쯤 가보자"

"조금 다른 것도 먹어보자"

"입어보지 않았던 옷도 입어보자"

"어제도 오늘도 똑같지 않은 스타일로 해보자"




매거진의 이전글 # 축제까지는 아니어도 일상을 소풍처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