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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복 Jun 08. 2024

# 은퇴 디데이, 남일 같지 않지만 이런 결심

은퇴자아내일기

수업을 하고 돌아오니 남편이 나를 맞이해 주었고, 점심밥을 차려주었다. 

모처럼 휴가여서 그렇게 한 일인데, 돌아오자마자 피곤이 다 씻기는 것만 같았다.

'남편도 회사에서 돌아오면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한편으로는 이 낯선 풍경을 자연스러움으로 받아들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이번 날 말일이면 회사를 나오기 때문이다. 


23년을 근무했더니 나이가 벌써 이만큼 와 있다. 남편을 소개로 만났을 무렵, 7년 차 직장인이었는데 마치 남편과 16년을 같이 회사에 다닌 것처럼 내 숨도 벅차다. ' 언제 이렇게 시간 이 흘렀을까?' 

그 사이에 무수히 많은 일들이 부부라는 이름으로 같이 흘러왔다.

결혼하자마자 엄마 아빠가 되었고 출산과 동시에 모든 시간은 남자와 여자에서 아빠와 엄마로 배를 갈아타게 해 주었고 새로운 이름표를 목에 걸어줬다. 회사일에 대한 스트레스, 압박하는 상사에 대한 힘겨움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 느린 시간도 어느새 흘러갔다. 그 상사는 퇴사를 했고, 아이들은 점점 독립적으로 커가고,  회사 동료의 권유로 테니스를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테니스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좋아하는 인생 취미가 되었다. 


흘러가는 일, 반전이 되는 일. 

인생에 모든 것을 이렇게 단순하게 정리할 수는 있을까? 나는 이 과정을 글로 쓰고 싶다. 

남편의 마음을 듣고, 일상을 보며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을 쓰고 싶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이야기를 얼마만큼 자세히 쓰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어서 어쩌면 쓰다 포기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따금 쓰던 것들이 마치 경로가 되어 다음 글을 쓰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 그래서 그다음은 어떻게 되었는데?' 


2주 전 남편의 친한 동료, 비슷한 또래인 동료가 은퇴를 했다. 

퇴사하던 날 배웅을 해줬다는 말을 듣고 왈칵 뜨거운 무언가가 솟았다. 때가 되어 맞은 은퇴, 뭘 더 준다고 해도 싫고, 은퇴 이후 계획도 전무하지만 일단 쉬고 싶다고 떠난 동료의 마지막 배웅 길은 한 달 뒤 남편의 모습이기도 하니까. 남일 같지 않았다고 했다. '남일 같지 않은 일' 그 문장은 생각보다 많은 여운을 남겼다. 

라디오에서 들었던 리버 조던이 자신의 아들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으로 파병을 자원했을 때 가족들은 모두 놀랐지만, 리버 조던은 그 일을 계기로 낯선 이들을 위한 기도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후에 기도 책이 나온 이야기를 들었다.  반전의 일을 듣고 났더니 어떤 행동을 선택할지 한편으로는 몸도 마음도 가볍게 다가온다. 


우리는 어떤 결심을 하게 될까? 이 질문을 하면 뭔가 거창하여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런 마음은 선명하다.  남편에게 그동안의 수고에 대한 자신을 향한 보상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시간이 되도록 하고 싶다는 것과 인생의 전반기의 시간을 아쉬움 없이 매듭짓기를 하도록 남편을 바라보고 싶다는 것이다. 


 

"회사 가기 싫은 날도 가느라 수고 많았어요.

할 일에 치여 힘든 날도 많았을 텐데 잘 넘어왔어요.

그만두고 싶었던 날도 있었을 텐데, 잘 인내해 준 것 고마워요. 애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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