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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순 Jan 19. 2022

4. 차가움과 따듯함

     당신의 언어의  온도는 어디쯤

밤을 주우려면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가지와 가지 사이 공들여 만들었을 거미줄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맨 살에 거미줄이 닿아 엉겨 붙는 불쾌한 끈적끈적함이 싫어 피해 다니지만 바닥을 응시하느라 미쳐 거미줄을 보지 못할 경우 어쩔 수 없다. 거미줄을 사방으로 흩뜨려 놓아야 한다. 거미 입장에서는 산사태만큼이나 대책 없이 당하는 천재지변일 것이다.


시골에서 며칠 전 밤을 주웠다.

동서가 거미줄을 뚫고 나아가다 잠시 멈춰 서서 말했다.

"거미야, 미안해. 내가 못 봤다."

스레 내가 거미가   대답하면서 가슴 언저리가 따듯해 오는 것을 느꼈다.  

"음, 못 봤다니까 어쩔 수 없네. 하지만 오늘은 굶어야 할지도 몰라."

지극히 예민한 사람들은 가짜와 진짜의 미묘한 차이를 구분해 내며 위장된 따듯함은 하얀 거짓말처럼 오래가지 못한다. 새삼 '언어의 온도'를 떠올렸다. 언어는 발화하는 사람의 생각을 전달하는 장치이므로 언어의 온도는 곧 그 사람의  온도일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 따듯한 것이 그리운 계절이다. 유리 찻잔을 꺼내 차를 우렸다.  우려진 녹차는 연한 풀빛을 띄었다. 속이 훤히 보이는 찻잔을  손에 모아 쥐고 창가에 서서  온기를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들였다. 이럴  마시지 않아도 좋다. 피부로 전해지는 따스함의 촉각이 모세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진다. 서서히 전해오는 따듯함에 전율이 온다.  


'그래! 결심했어.'

퇴근하자마자 구지를 불러 식탁 유리를 치웠다. 우리 집에서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유리가 사라지는 순간이다. 책상 유리며 다탁 유리는 몇 년 전에 치워버렸다. 하지만 식탁만큼은 이런저런 이유로 남겨두었는데 과감히 감행한 것이다. 유리를 걷어내자 무광의 나무가 속살을 드러낸 겨울나무처럼 그대로 드러났다. 밋밋하다. 식탁과 숱한  손과의 마주침이 시간을 두고 광을 만들어주면 좋겠고, 생활의 스크레치는 훈장처럼 무늬로 남아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유리! 서릿발 같은 차가움이 싫어 맨 살과 부딪히는 곳의 모든 유리를 치웠지만  그릇은 여전히 유리그릇을 선호한다. 빛을 투과시키는 성질로 속을 금방 알 수 있다는 이유가 첫 번째이고 과거의 흔적을 덕지덕지 묻혀두지 않는다는 것이 그 두 번째 내가 유리그릇을 좋아하는 이유다.  


결국 그릇이든 판유리든 유리라는 성분은 같을 텐데, 나의 호불호는 이렇게 전적으로 나의 쓰임에 의해 갈린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말해 달라. 그럼 내가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주겠다."  

의미는 이렇게 나열된 것들로 해석된다. 그러니 많은 것을 담기도 하고 흘리기도  하는 말은 그 의미가 아니라 맥락과 파장에 의해 몸으로 읽혀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의 거친 말이 부드러운 파장으로 다가오면 말의 외피보다 진심이 먼저 피부로 스며드는 것이 그 증거일 것이다.


식탁 유리하나 치우면서 별스런 상상을 한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없는 것을 채우려고 욕망한다고 한다. 내가 이토록 따듯함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식물이 빛을 향해 뻗어가는 것과 비슷하다. 내게 온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18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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