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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온다 Mar 30. 2022

산이냐 바다냐, 고민이 되는 당신에게

해파랑길 유랑기

몸 쓰는 걸 참 좋아한다. 각종 운동을 배우려 기웃대는 건 물론이고 회사에서도 점심 식후 30분 정도를 오롯이 산책에 쏟는다. 어쩌다 식사 시간이 길어지거나 해서 산책을 못 가게 되는 날이면 동료들이 걱정해 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은 못 걸어서 어떡하냐고.


그래서였을까, 2015년에는 (이제는 너무 많은 이가 다녀와 희소성이 퇴색되어 버린) 스페인의 까미노 데 산티아고 프랑스길을 다녀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만큼 걷기와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남자와 결혼을 했다. 언젠가는 함께 까미노 길을 걸으러 가겠노라 다짐했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많고. 결혼 이후 다른 나라들만 기웃대다가 팬데믹의 시대가 찾아왔다. 기내식을 못 먹은 지 만 2년, 'beef or chicken?'이 그리워질 때쯤 남편이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스페인에 못 간다면, 한국에서 순례길을 걸어 보자"


이름하여 해 파 랑 길.


들어본 적은 있었다. 부산에서 시작하여 저 멀리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동해 바다를 끼고 걷는 길을 만들었다고. 네이버 지도에서 검색하면 대충 아래 사진과 같은 경로가 나온다.


"한꺼번에 다 걷자고?"

"여보, 회사 그만둘 거야?"


멍청한 말을 뱉고 말았다. 770km에 이르는 길을 어떻게 한번에 걷는단 말이오. 남편의 계획은 이랬다. 두세 달에 한 번 정도, 주말을 끼워 하루 이틀 휴가를 써서 3박 4일 정도로 걸어 보자고. 거리 계산을 해서 미리 숙소만 예약해 두면 될 터였다. 그래 가 보자. 나 이래 봬도 33일 연속 걸어본 사람이야, 10kg 배낭을 메고 하루에 35km도 걸어본 여자라고!


                  2015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걷던 중. 가방이 꽤 크고 무거웠는데 사진에는 잘 안 담기네...



결심을 했다면 다음 해야 할 일은 경로와 숙소 정하기. 짧은 순간이나마 해외여행 준비를 하는 것마냥 설렜다. 가고 싶은 지역을 찾고, 그곳에서 또 보고 싶은 스폿을 정하고, 맛있는 식당과 아늑한 숙소를 예약하는. 그때의 두근거림이 좋아 우린 항상 여행을 갈망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며 열심히 서치에 나섰다.


우리의 조건은 세 가지 정도였다.

1. 꼭 1코스(시작점: 부산)부터 시작할 필요는 없다.

 - 어차피 나눠서 걸을 길이고, 부산은 남편의 고향(a.k.a. 시댁)이기에 언제든 갈 수 있다.

2. 시작점이 서울에서 출발하는 KTX 기차로 닿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 도착하자마자 바로 걸을 건데 장거리 시외버스나 완행열차를 타고 가면 이미 체력이 소진돼버릴 수도 있다.

3. 5성 호텔급 숙소를 기대하지 마라.

 - 해파랑길 경로에 있는 숙소를 잡아야 한다. 우리는 뚜벅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3박 4일 일정으로 해파랑길 33~36코스를 걷는 것.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강원도 동해시의 동해역에 내려 33코스의 시작점인 추암해수욕장으로 이동해 시작하기로 했다.(실제로는 아침식사 때문에 삼척으로 더 내려가서 걷기 시작해 시간과 거리는 좀 더 소요되었다.) 하루에 17, 18km 정도를 이동하는 일정이었고, 강원도 삼척시(아주 잠깐), 동해시, 그리고 강릉시를 거치는 코스였다. 마지막 4일째 되는 날엔 걷지 않고 강릉 시내에서 관광을 하며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따라서 실제로 걷는 날은 3일인 셈이다.


숙소는? 첫째 날과 둘째 날은 그 길에 있는 펜션들 중 그나마 평점이 좋고 시설이 괜찮아 보이는 곳으로 예약했다. 하지만 첫째 날 숙소에 들어선 순간 울고 싶어졌다. 화장실 타일에 아주 예쁘게 피어나 있던 곰팡이들 안녕?(첨부하려니 사진이 없다.) 나중에 들으니 남편도 다시 돌아 나가고 싶었지만 그러면 내가 더 우울해할 것 같아 아무 말하지 않았다고. 자세한 내용은 첫째 날 33~34코스 편에 다시 후술할 예정. 그리고 셋째 날은 걷기를 마치고 우리에게 보상을 주는 의미에서 무려 '스파!'가 있는 펜션으로 예약했다. 후훗. 역시 자세한 건 셋째 날 36코스 편을 기대해 주시라.


자 그럼 이제 남은 건? 각자 회사에 휴가를 내고 짐을 잘 싸서 기차를 타는 것. 그리고 발에 부담이 안 가는 신발을 신는 것. 나는 지난 1월에 일상생활용으로, 그 유명한 호카오네오네의 본디7을 샀다. 러닝용이라지만 워낙 푹신해 장거리를 걸어도 발에 피로도가 그리 쌓이지 않을 것 같아 등산화 대신 본디7을 신기로 했다. 문제는 남편. 남편은 양발의 아치가 무너진 평발을 가졌다. 그 때문에 군대에서도 행군할 때마다 고통이 극심했다고 한다. 며칠 인터넷을 열심히 뒤지더니 평발을 위한 신발이라며 아식스의 젤카야노 운동화를 사 왔다.


출처: 아식스 공식 홈페이지


결론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다. 다행히 3일간 둘 다 다리와 무릎, 발목에 큰 문제없이 잘 걸었고, 세번째 날은 산 하나를 오롯이 넘는 등산 구간이었음에도 두 신발 모두 잘 버텨줬다.


짐도 최대한 가볍게 싸야 했다. 등산복 등 가벼운 기능성 의류 위주로 챙기고, 속옷과 양말은 가서 손빨래하면 되니 최소한만 넣었다. 처음에 남편이 밤에 숙소에서 넷플릭스라도 봐야 하지 않겠냐며 노트북을 들고 간다길래 "숙소 들어가서 씻고 밥 먹고 누우면 졸릴 걸? 볼 시간이 있을까?"라고 대꾸해 줬더니 다행히 알아들었다. 몸 쓰는 여행에서 짐이 무거우면 화가 솟구치는 건 진리다. 물론 누군가는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해 산티아고 순례길에 무겁디 무거운 핸디캠을 들고 갔다고 한다. 영상은 초반 4일 정도 찍고 찍지 않았다고 한다....

 

요 정도 되는 배낭을 메고 걸었다.


삼일절 연휴를 끼고 우리는 동해로 떠났다. 30대 부부의 들쭉날쭉 해파랑길 유랑기의 첫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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