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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온다 Jun 28. 2022

다시 가 본 축산항

해파랑길 21, 22, 23코스 유랑기

후포에서의 아침이 밝았다. 이번 숙소에는 베란다가 없어서 그런지 손빨래한 양말이 제대로 마르지 않았다. 두꺼운 스포츠 양말이라 그런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집게로 배낭 뒤에 양말을 고정시키고 걸으면서 말리기로 했다. ¡Que será será! 약 7년 만에 느껴보는 까미노 기분이랄까.


이날은 드디어 울진을 빠져나와 영덕으로 들어가는 날이었다. 걸어서 군 경계를 넘다니. 오랜만에 해보는 일이라 조금 설렜다. 후포해변을 지나 조금 더 걷자 금음리라는 마을이 나왔고, 그곳이 울진의 마지막이었다. 울진과 영덕의 경계를 표시하는 안내판이나 비석 등은 없었는데 금음리 다음 마을인 지경리에 들어서자 그곳이 영덕이었다. 그냥 붙어 있는 마을 같았는데 군이 달라지다니. 신기했다. 여기 사시는 분들은 그냥 한 동네라고 생각하며 사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덕의 귀여운 버스정류장

그렇게 영덕에 들어서자 가는 방향 오른쪽으로는 7번 국도(요새는 동해대로라고 부르는 것 같더라)가 펼쳐졌다. 그 말인즉슨 차가 많이 지나다녔고 시끄러웠다는 말이다. 고요한 울진 바닷가를 걷는 것과는 딴판이었다. 왼쪽으로는 여전히 쨍한 동해가 우리를 반기고 있었으나 워낙 소음이 심하다 보니 그 바다를 오롯이 마음으로 넣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겠나. 일단 시작한 길에 빠꾸는 없었다. 영덕의 그 유명한 고래불 해변을 향해 한발 한발 걸음을 옮겼다.


오전 10시를 좀 넘은 시각, 드디어 고래불에 도착했다. 총 백사장 길이가 8km 정도 된다는데 정말 길고 길었다. 8km면 우리나라 전체 해수욕장 중 길기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 것 같았다. 길이도 길고 백사장 모래 폭도 넓어서 여름 피서철엔 정말 많은 관광객이 오겠다 싶더라. 아마 내가 계속 대구에 살았다면 무조건 수영하러 왔겠지. 우리가 간 날은 평일이고 아직 한여름은 아니라 바다에 들어가서 수영을 하는 사람은 안 보였다. 한가롭게 커피 한 잔씩을 들고 산책하는 사람들, 자전거를 타고 와서 해수욕장 앞 고래 조형물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해수욕장 앞 식당과 카페에선 요란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모두 울진에선 보기 힘든 풍경이었다.

고래불 해변. 실제는 정말 더 길고 장대하다

해변 앞에서 잠깐 쉬었다 출발했다. 웅장한 백사장을 좀 더 느끼고 싶었으나 해가 너무 강했고 그날도 갈 길이 구만 리였다. 23, 22, 21코스까지 다 걷는 코스였다. 생각보다 울진과 영덕의 해변가 숙소가 마땅찮아서(풀빌라를 이용할 예산은 없었고 그 밑에서 고르다 보니 평타를 치는 곳이 그리 많지가 않았다....ㅠㅠ) 숙소에 맞춰 코스를 짜다 보니 벌어진 대참사.... 보통 하루에 20km 정도를 걷는 게 적당한 건데 셋째 날과 넷째 날은 거의 30km를 걸어야 했다. 30km는 까미노를 걸을 때도 일정의 중반을 넘어섰을 때, 10kg의 배낭을 메고 걷는 게 몸에 완전히 익숙해졌을 때 걸었던 거리였다. 서울 도심만 좀비처럼 헤매고 다니던 몸뚱어리를 끌고 와선 3일 만에 30km를 걸으려니 죽을 맛이었다. 으허허허.


하지만 누굴 원망하리. 도저히 안 되겠으면 택시를 타면 된다는 마음으로 점심 먹을 식당이 있는 대진해수욕장으로 향했다. 날도 덥고 바다에 왔으니 메뉴는 물회로 정했다. 대진해수욕장 끄트머리에 위치한 조그마한 식당이었는데 평점이 괜찮았다. 일반 물회, 소라 물회, 전복 물회 등이 있었는데 그 어디서도 먹어보지 못한 '백합' 물회가 있어서 그걸로 시켜보았다. 백합살로만 물회를 만든다고? 이윽고 사장님이 음식을 가져오셨다. 야채와 양념장, 수북하게 쌓인 백합살이 대접에 가득했다. 거기다 물과 특제 고추장을 넣어서 비벼 먹으면 된다고 했다. 비비기 전 백합살만 먹고 싶어서 한 점을 꿀꺽했다. 참기름과 참깨가 살짝 발라진 백합은 고소하고 담백했다. 고추장과 회를 비비면서 살짝 보니 백합살 밑에 다진 마늘과 다진 청양고추가 보였다. 경상도에 오긴 왔구나, 매콤한 경상도 음식이 여기 있구나, 경상도 여자가 경상도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혼자 흐뭇했던 포인트)

백합 물회!


맛은? 말해 뭐하리. 3시간 여를 땀 흘리며 걷고 나서 먹는 시원한 물회인데 말이다. 다른 미사여구가 전혀 필요 없었다. 그렇게 대진항을 지나서 원래 해파랑길 22코스를 걸으려면 아래 지도처럼 내륙으로 들어가 산봉우리를 타야 했다. 왜 그렇게 코스를 짜 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 날씨에는 도저히 산을 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계속 해안길을 걸어 축산항까지 가기로 했다. 분명히 내륙에도 뭔가 볼 게 있을 것이고, 산에 올라가서 보는 바다가 멋지다는 것도 잘 알았지만 몸이 산행을 거부하고 있었다.

원래 해파랑길 22코스


그렇게 바닷길을 걸어 걸어 영덕의 큰 항구 중 하나인 축산항에 도착했다. 2014년 한국기행 촬영할 때 땜빵 촬영으로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신기하기도 하지. 다시는 올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곳에 난데없이 떨어진 기분이었다. 그때 여기서 오징어 건조 사업하시는 분을 따라와서 오징어를 경매로 낙찰받는 것부터 집에 가셔서 건조 작업하는 것까지 찍었었는데. 문득 생각나서 유튜브에 갔다 왔다. 추억 돋는 방송쟁이 시절.(그땐 이렇게 하루 8시간 사무실에 갇혀 있을지 몰랐지.^^) 혹시 몰라 링크 걸어둔다. 1편 뒤쪽부터 2편 초반까지다. 목소리도 나오네. 세상에.

 https://www.youtube.com/watch?v=fcU7IrHdEUg (한국기행 - Korea travel_가을길 1부 영덕 블루로드_#001)

 https://www.youtube.com/watch?v=z6YGQxMe34U (한국기행 - Korea travel_가을길 1부 영덕 블루로드_#002)


축산항이 오늘 여정에서 마지막 번화가라 이곳에서 커피 한 잔의 호사를 누리고 가기로 했다. 카페 이름은 '파랑길 카페'. 자전거 라이더들과 도보 여행자들이 많이 오는 듯했다. 우리가 들어가니 사장님이 "걸어오시느라 더우실 텐데 에어컨 켜 드릴게요" 하면서 바로 에어컨을 켜 주셨다. 감사합니다. 시원하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하고, 숙소가 있는 노물리까지 남은 2시간의 여정을 다시 시작했다.


가기 전에 경정리라는 마을을 지나가야 했는데, 마을 초입에서 꽹과리 소리 등 사물놀이 소리가 들려왔다. 마을 축제인가? 무슨 일일까? 배낭을 멘 발걸음이 빨라졌다. 항구 앞 공터 하늘엔 만국기가 매달려 있었고, 천막이 쳐져 있었는데 그 안에 한복을 입은 분들이 둘러앉아 꽹과리, 장구 등을 치고 노래를 부르고 계셨다. 천막 앞에 걸린 현수막에 쓰인 글자는 '경정1리 풍어제'. 와, 풍어제라니. 이런 귀한 구경을 걷다가 해 보는구나. 마을 어르신들이 다 나오셔서 음식도 드시고 축제 구경도 하고 계셨다. 노래 부르시는 분은 왜 이렇게 호응이 적냐며, 힘 빠져서 노래를 못 부르겠다며 어르신들의 박수를 유도하기도 했다. 시간이 넉넉하면 앉아서 구경을 좀 더 하다 오는 건데. 숙소까지 남은 길이 적지 않아 아쉽지만 발을 떼야했다. 한국기행 촬영 중이었다면 진짜 대박을 건지는 건데 하는 생각도 했다. 세 살 버릇 오래 가네.


경정리를 지난 후의 원래 해파랑길 21코스는 일반 도로가 아니라 바닷가 절벽(은 아니고 바다 옆 소나무 숲 정도 되겠다)에 설치한 데크를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며 걷는 길인데 마침 우리가 갔을 때 그 바닷가 길 전체가 보수 공사 중이었다. 조용하게 차 없이, 바다만 보면서 걸을 수 있는 길인데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했다. 찻길을 따라 계속 내려갔다. 다행히 큰길은 아니고 2차선 도로라 조심하며 걸었다. 막판이 되니 남편도 나도 지쳐서 말 한마디 없이 걷기만 했다는 건 함정. 30km는 짧은 거리가 아니다.


거의 저녁 7시가 다 되어서야 도착한 숙소. 전날, 전전날과 똑같이 들어가자마자 손빨래를 하고, 2시간 전 지나온 축산항의 호식이두마리치킨에서 닭과 맥주를 시켜서 배부른 저녁을 먹었다. 그래도 배달이 되는 곳이었다. 영덕 첫날 끝!

호식이 하이 정동원 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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