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식품의 '유통기한'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던 적이 있다. 유통기한은 말 그대로 보통의 소매점에서 판매를 위해 물건을 매대에 올려둘 수 있는 기한이다. 판매를 그 기한까지만 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유통기한이 지났다고 해서 곧바로 식품이 변질되거나 상하진 않는다. 편의점에서는 유통기한이 지난 삼각김밥이나 우유 등을 알바생들에게 공짜로 쥐어주곤 한다. 유통기한 지난 우유에서 바로 꼬릿한 냄새가 올라오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다 보니 별 문제 없는 식품들이 무분별하게 많이 버려지곤 했다.
이런 식품 낭비 사태(!)를 막기 위해 계도 기간을 거쳐 작년부터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는 '소비기한' 표시 제도를 도입했다. 기존 판매자 중심이었던 유통기한 표시제를 탈피해 소비자 중심으로, 소비자가 먹을 수 있는 기한을 명확하게 표시한다는 취지다. 기존 유통기한보다는 날짜가 좀 더 늘어난다고 보면 된다. 서울 장수 막걸리의 기존 유통기한이 제조 후 10일이었다면 소비기한은 14일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버려지는 음식이 조금은 더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음식 뿐만 아니라 사람 관계에서도 유통기한이든 소비기한이든, 그런 유효한 기간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학창 시절을 거치고 회사 생활을 하고, 취미 활동 등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요새는 온라인을 통한 만남도 굉장히 쉬워서 의지만 있다면 인간관계를 넓히는 건 일도 아니다. 하지만 구성원 서로의 노력이나, 공통의 관심사 등이 옅어진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연결고리는 점차 약해지게 마련이다.
나만 해도 영국 교환학생 시절 그 머나먼 타지에서 함께 생활하며 죽고 못 살던 한국 친구들과 지금 전혀 연락하지 않는다. SNS로는 서로 팔로우가 되어 있어 어떻게 지내는지는 염탐하고 있지만 실제적인 연락은 안 한 지가 오래다. 나의 잘못도 있지만 뭔가 삶에서 공통분모가 없어지며 자연스레 관계가 해체돼 버렸다. 바꿔 말하면 유통기한이 다 되었달까.
대학 사람들과 10년이 넘게 이어져 오는 모임이 두어 개 있다. 다들 단톡방도 있고, 거기서 한 번씩 수다를 폭발시키기도 하고, 경조사가 있으면 한번씩 오프라인으로 얼굴을 보기도 한다. 열 명이 넘는 단체 모임도 하나 있는데 인원이 많다 보니 친소 관계가 모두 동등하진 않다. 그래도 다들 사이는 좋았고, 만나면 광대가 아프도록 웃어 제끼곤 했다.
특히 그 중에 유독 친하게 지냈던 동갑내기 두 여자가 있다.(나는 아님) 함께 여행도 가고 술도 많이 마시고 골프도 치러 다니고 그랬다. 둘 다 결혼도 안 한 상태라 자주 만나는 듯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둘이 만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싸웠다기 보다는 어느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단다. 둘 모두를 아는 입장에서 안타까움은 있었지만 각자의 사정이 있을 테고, 30대 중반의 성인이 내린 결정인데 주변에서 뭐라고 왈가왈부하기는 어려웠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인간관계에도 유통기한이라는 게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 사이 뿐 아니라 부부나 연인 관계도 마찬가지다. 연인들이 헤어지는 이유도, 결혼한 부부가 갈라서는 이유도 유통기한이 만료됐기 때문일까. 결혼해서 같이 살고 있지만 서로 대화 한 마디 없이 남보다 못한 사이라는 부부도 많지 않은가. 식품은 자연스럽게 미생물에 의해 발효와 부패가 진행되면서 유통기한이 다 해 가는 거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는 무엇 때문에 기한이 만료되는 걸까. 대화와 행동, 감정에도 알게 모르게 미생물이 살고 있는 걸까.
어쨌거나 저쨌거나 애정하고 사랑하고 오래도록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부패가 진행되지 않게 관심을 가져주고 좋은 관계를 유지해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유통기한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이다. 일방적인 관계는 어디에도 없다. 팬들의 사랑을 일방적으로 받을 것만 같은 연예인도 끊임없이 팬에게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고 팬서비스를 통해 양방향 소통을 하고 있다. 그간 나의 불찰로 유통기한이 다 해 버린 수많은 관계를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새해에는 주위 인연들을 좀 더 잘 챙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진심이다. 커피 한 잔 하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