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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연 Mar 28. 2016

시대정신이 사라진 자리

왜 인문학인가?

 인문학은 새로운 시대정신이 되었다. 대학에서는 여전히 인문학을 무시하지만, 사람들의 인식은 정 반대이다. 인문학이 지금의 위기를 진단하고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많은 학자들도 인문학적 사고를 강조하고, 심지어 인생의 성공까지 인문학을 통해서 하자는 이들이 있다. 정말 인문학은 그런 학문일까?


 인문학을 풀어보자면, 인간의 문제에 관한 학문이란 뜻이다. 마치 다른 학문은 인간을 배재한 체 존재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조금 더 자세히 인문학을 살펴보면, 우리가 현재 배우는 인문학은 철학, 역사, 문학으로 나눌 수 있다. 인문학이 고전에 집중하는 이유도 이 세 가지 분야는 고전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기 때문이다.


다들 인문학이 중요하지만, 난 여전히 그것이 왜 중요한지 모르겠다. 인문학이 강조하는 고전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인가? 우선 인문학이 우리나라에 유행된 시점으로 가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고백하자면, 사실 나 역시 인문학의 중요성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 출발은 2006년 <희망의 인문학>이라는 책이었다. 그 전까지 인문학이 무엇인지 감조차 잡지 못한 상태였다. <희망의 인문학>은 미국에서 노숙자들에게 대학 수준의 인문학 강좌를 했더니, 그들의 삶이 변했다는 이야기를 전파한다. 얼마나 그 이야기가 매력적인지 마치 내 삶을 노숙자와 대비시키면서 인문학에 대한 환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믿음은 시작되었지만, 내 이성이 완전히 투항한 것은 아니었다. 노숙자가 인문학 공부를 했다고 모두 인생을 변화시켰다는 주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 마디로 인문학은 계기가 될 수는 있지만, 현실 변화의 원동력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희망의 인문학>은 많은 신문과 방송에서 다루어졌고, 대학들은 대중에게 인문학 강좌를 시작하였다. 인문학 전공이 죽어가고 있는 현실이었으니, 대학 역시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출판계는 이런 분위기에 바로 화답했다. 특히 자기계발서 작가들은 인문학을 통해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대표적인 작가가 이지성이다. 깊이는 없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흔드는 기술은 탁월하다.


현재에도 인문학은 대한민국 사람들을 흔들어 놓고 있다. 성공이라는 가치는 사라졌고, 인문학을 통한 변화의 환상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인문학과 관련된 글쓰기, 책읽기 역시 인생을 변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바라본다. 나를 포함한 글쓰기나 독서법 저자들은 이런 시류를 편승한 것이다. 특히 나는 알면서 편승했으니 더 나쁜 놈일 테지만.


잠시 역사를 바라보자. 특히 대학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인문학의 실체가 드러날지 모르겠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학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통일된 독일이 19세기 말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전공 교수와 전공 수업 체계가 시작되었다. 철저히 자본주의에 걸맞은 교육시스템으로 변화된 것이다. 그 전의 대학은 중세시대에 등장했지만, 여전히 엘리트 교육과 종교교육이 혼합된 형태였다. 즉 문법, 산수, 논리학, 수사학, 음악, 기학 등을 가르쳤을 뿐이다. 종교개혁의 지식 무기 생산자로 대학이 역할을 했을 뿐이고, 오히려 대학 외부에서 철학과 과학 등이 발전했다. 대학은 외부의 지식인들을 흡수했을 뿐이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대학교육을 비판한 것은 이런 시대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와 관련 없는 중세시대 교육을 17세기까지 이어갔으니 불만이 가득했을 것이다.


우리는 인문학을 고전을 통해서 습득하려고 한다. 역사는 그리스와 로마에 집중하고, 철학은 동양과 서양철학을 나누어 배운다. 그나마 서양철학의 대부분은 그리스 아테네를 벗어나서 근대철학까지 나아간다. 이런 현실에서 의문은 필연적이다. 시대가 바뀌었는데, 과거의 지식이 정말 도움이 될까? 학문이 시대에 따라 변화했는데, 과거의 학문을 배우는 것이 현실에서 도움이 될까?


한 마디로 확정 짓기는 쉽지 않다. 이해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현재의 인문학 열풍은 자본주의 시대의 요구에만 충실한 학문을 거부하는 흐름이다. 자본주의에 따라 나뉜 학문의 체계를 거부한다. 정치와 경제를 나누고, 경제와 경영을 나누고, 경영과 행정을 나누어서 배워야 하는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 반대하는 입장은 무엇일까? 여전히 지금 배우는 인문학은 현재를 이해하는 도구가 아니다. 땅을 파기 위해 국자를 든 꼴이다. 인문학을 통해 삶의 성찰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사실 자기계발서와 큰 차이가 없다. 자기계발서는 성공이라는 환상적 관념을 주입해서 현실의 고통을 견디게 한다. 인문학은 어떤가? 역사와 철학을 통해 교훈을 얻고 현실을 수용하게 만든다. 무엇이 다른가? 모두 개인적 차원에서만 사회를 이해하게 만든다. 


이 세상에 인간과 관련 없는 학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천체 물리학도 인류가 사는 지구를 위해 존재한다. 인문학의 열풍은 바람직하지만, 그 한계를 모르는 인문학 열풍은 자기계발서 열풍과 다르지 않다. 언제까지 현실을 수용하기 위해서만 노력해야 하는가? 그것도 철 지난 과거의 학문으로 말이다. 인문학이 대한민국 사람의 머리 위에 있는 것은 언제나 옳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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