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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박 Aug 21. 2021

제자리걸음도 운동이 되듯이

김영하의 <보다>를 읽고....

내 욕망의 소외

  지난주에 나는 우리 회사가 인공지능에 어떻게 접근하면 좋을지에 대한 리포트를 본사 부사장님께 보고 드렸다. 인공지능이라는 ‘기술’이 아니라, ‘고객이 인공지능에 대해 무엇을 기대하는가’에 대한 연구 결과를 말씀드리는 자리였다. ‘연구’라는 것이 거창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주요한 방법은 고객 조사를 하는 것이다. 많이 알려진 설문조사는 물론이고 고객이 미처 표현하지 못하는 욕망까지 읽어내기 위해 일기를 쓰게 하고, 고객의 집을 방문하여 하루의 생활을 관찰하거나, 매장에서 물건을 고르는 고객의 시선을 파악하는 기술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사업 영역에서 그들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우리 부서 연구원들이 하는 일이다. 회사의 이익이 아니라 고객을 위한다는 ‘윤리적으로 보이는 선입견’과 ‘타자의 마음을 읽어낸다는 신비로움’ 때문인지 사내에서 우리 부서의 인기(?)는 계속 올라가고 여름휴가를 가을로 미뤄야 할 정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그런데 고객들의 욕망을 읽어낸 후 집으로 돌아온 나의 머리는 늘 복잡하기만 하다. 이렇게 회사만 다녀도 괜찮을까? 퇴사해서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 나만 정체 중인 것은 아닐까? 남는 시간을 아껴서 다른 직업을 준비해볼까? 그전에 독립부터 해야 할까? 세월이 지나도 지금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으면 어쩌지? 발은 땅에 꾹 눌러 붙인 채로 목만 길게 내민 채 이 세계 저 세계를 기웃거리는 미어캣이 된 느낌이다.

“한동안 나는 망명정부의 라디오 채널 같은 존재로 살았다. 소설가가 원래 그런 직업이라고 믿었다. 국경 밖에서 가끔 전파를 송출해 나의 메시지를 전하면 그것으로 내 할 일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2012년 가을에 이르러 내 생각은 미묘하게 변했다. 제대로 메시지를 송출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사는 사회 안으로 탐침을 깊숙이 찔러 넣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보는 것, 듣는 것, 경험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작가의 말, 209쪽)

  김영하는 자발적 타향살이 중에 한국에서 벌어진 삼풍백화점 붕괴, 숭례문 화재, 세월호 침몰 등의 사건 사고 밖에서 배회 중이었다. 그는 배회하기를 멈추고 우리 사회에 필요한 메시지를 찾기 위해 그에게 익숙한 소설 형식을 벗어나기로 했다.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26가지 개인적, 사회적, 문화적 현상 이면에 숨겨져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의미들을 발견했다. <응답하라 1997>이 부산말‘로도’ 가능한 멜로의 세계가 아니라 부산말‘로만’ 가능한 멜로의 세계를 만들어냈다는 식의 미묘한 판단은 문제 앞에 앉아 탐침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빼서 곰곰이 관찰하고 생각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다. 나는 수많은 고객들의 삶에 탐침을 찔러 넣어 살펴보는 동안 정작 내 안에 어떤 욕망이 자리 잡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깊숙이 들여다본 적이 없다. 고민을 하게 만드는 욕망의 실체를 알아내기보다, 빠른 해답을 찾고 싶은 마음에 각종 미디어와 SNS를 통해 남들이 사는 법을 학습(?)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바깥만 향했던 나의 욕망

“우리의 내면은 자기 안에 자기, 그 안에 또 자기가 들어 있는 러시아 인형이 아니다. 우리의 내면은 언제 틈입해 들어왔는지 모를 타자의 욕망들로 어지럽다. 그래서 늘 흥미롭다. 인간이라는 이 작은 지옥은.” (2부: 잘 모르겠지만 네가 필요해, 75쪽)

  영화 <건축학개론> 속 서연(한가인)은 타인의 욕망과  자기의 욕망을 구분하지 못한다. 피아니스트라는 이루지 못한 꿈은 아버지의 꿈이었는지 서연의 꿈이었는지 분간할 수가 없고, 그녀가 살고 있다는 개포동은 대학생 시절의 승민(엄태웅)이 정릉에 살면서 늘 궁금해하던 거주지의 반대편이었지 그녀가 살고 싶던 곳이 아니다. 그녀는 주변(특히 아내 잃은 아버지)의 기대와 시선에 맞춰 사느라 자기 욕망은 외면해온 삶에 익숙해졌다. 그래서인가 이혼의 아픔과 병든 아버지를 부양하며 지쳐버린 그녀에게 삶이란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모르겠고, 그냥 맵기만 한 매운탕’ 같기만 하다. 문득 승민에게는 사람 마음만 갖고 논 ‘쌍년’인 서연에게 측은한 마음이 든다. 서연만큼이나 나의 내면도 타자의 욕망들과 뒤섞여 어지럽기만 하다.

  내가 기억하는 한 중학교 시절부터 나는 외향적인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다. 나는 가족/친지 모임에서도 부모님 등 뒤에만 숨어있을 정도로 내성적이었다. 반면 TV 드라마 속의 똑똑하고 자기표현이 분명한 기 센(?) 여성들은 늘 멋져 보였고, 엄마가 틈만 나면 칭찬하던 과외 선생님은 활발하고 유머러스했다. 그렇게 내 안에 내향적 성향은 부정적이고 외향적 성향은 긍정적인 것으로 자리 잡았다. 대학 진학 후에 만난 세상도 외향적인 사람들의 편인 것 같았다. 취업 후에도 도전적이고, 인적 네트워킹에 뛰어나며,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 되기를 강요받았다.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눈에 띄는 문서로 포장해서 임원진에게 발표하고 평가받는 시스템이 버거워 집에 돌아와 이유 없이 대성통곡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엄청난 절망 후에도 같은 시간에 출근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열심히 일하다 다시 절망하는 반복 이외에 내가 할 줄 아는 것은 없었다. 소위 ‘쳇바퀴 같은 삶’을 벗어나고 싶다는 막연한 소망은 있었다. 그러나 입사 시험에서 주장했던 ‘여기에 들어와야 하는 명분’보다 더 강력하게 여기에서 ‘나가야 할 명분’이 없었다. 명예퇴직이나 외국인과의 결혼, 질병이나 사고만이 나를 여기에서 멈추게 하고 탈출시킬 것만 같았다.

  그렇게 같은 직장 같은 부서에서 거의 18년의 시간을 보냈다. 내가 사는 사회의 요구에 맞춰 최선을 다해 살아왔지만, 그 사이에 후배가 나를 앞질러 승진을 하거나 진급이 나보다 늦던 동료가 상사가 되기도 했다. 몇몇 동료들이 더 나은 회사로 이직을 하거나 창업을 하기도 했고, 띠동갑의 어린 후배가 내 집 마련에 성공하는 모습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도 했다. 결혼이나 출산 같은 개인적 변화마저 없는 세월을 보내다 보니, 주변 사람들은 앞서거니 옆서거니(?) 뻗어 나아가는데 나만 제자리인 것 같은 정체감에 괴로운 시간이 많았다. 틈만 나면 나는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고민했다. 퇴근 후에는 다양한 분야의 학원과 동호회를 섭렵하면서 숨겨진 소질을 찾아보려 했다. 성공한 사람들이 책과 강의를 통해 말하는 것처럼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써보려 애쓰기도 했다. 그들은 가능한 구체적이어야 한다고 했다. ‘10년 내에 10억 만들기, ‘7년 내에 내 집 장만하기’, ‘5년 후에 퇴사하기’ 등. 그러나 아무리 써보고 써봐도 이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남들의 욕망을 바라보며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최면을 거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오늘 오픈된 나의 리더십 평가에서 예상 못한 결과를 확인했다. 


욕망 대신 누적된 역량

  나는 늘 도전, 용기, 추진력, 외부 네트워킹이 약한 리더로 평가받아왔다. 스스로도 이건 천성이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바꾸기 위해 해야 하는 수많은 행동들이 두렵기만 했다. 그런데 올해의 평가 내용은 작년과도 사뭇 달랐다. ‘전문성 기반의 명확한 방향 제시, 주도적인 인사이트 도출, 강한 추진력, 분위기 주도, 빠른 결정’ 등 내가 알던 나와는 다른 모습의 기록이었다. 나는 제자리에만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제자리라고 해서 변화가 없던 건 아니었다.  

“어떻게 우리는 예측 불가능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우선은 자신이 예측 가능한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전제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탐정의 눈으로 자신의 일상을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조금씩 변화를 주는 것이다. 출근길을 바꾸고 안 먹던 것을 먹고 안 하던 짓을 하며 난데없이 엉뚱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며 우리는 점차 예측 불가능한 인간이 되어갈 것이다. 이런 엉뚱한 연습에서 얻어지는 부산물도 있다. 바로 자신에 대한 감수성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무심하게 내버려 둔 존재, 가장 무지한 존재가 바로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지 모른다.” (4부: 예측 가능한 인간이 된다는 것, 184-185쪽)

  김영하는 타자에게 이용되지 않는, 예측 불가능한 인간이 되기 위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의도적으로’ 일상의 변화를 주면서 자신에 대한 감수성을 높여보라는 것이다. 나에 대한 무지를 깨우치려는 의도 따위는 없었다. 타고난 성향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꾸역꾸역 나아가기는 했다. 어린 연차에 인원 부족 문제로 혼자 채워야 했던 빈 보고서, 무대공포증을 안고 해야만 했던 강의나 발표, 오합지졸 외부 경력자들만 가득했던 팀 리딩 경험들이 어느새 내 안에 역량이란 이름으로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를 내 욕망을 찾아 헤매던 취미들은 최신 트렌드를 알아야 하는 지금의 일에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의도하지 않았던 엉뚱한 연습들 덕에 ‘내가 몰랐던 나’ 대신에 ‘내가 모르는 새 달라진 나’를 발견한 기분이다. 


제자리걸음 중에 변화된 나

“우리가 가장 연기하기 어려운 존재,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끝없이 변화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게 무엇인지 영원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가장 연기하기 어려운 장면은 바로 우리의 일상일 것이다.” (3부: 연기하기 가장 어려운 것, 123쪽)

  변화 없는 삶을 살았다는 아쉬움도, 변화 없는 삶을 살 것 같다는 두려움도 나만의 오산이었다. 사람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끝없이 변화하며,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무엇인지 영원히 알 수 없다. 제자리걸음 같던 내 삶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변화가 생겼고, 앞으로의 내 삶도 지금과 같을 리 없다.  

  지금의 위치에만 있는 것은 뒤처지는 것 같아서, 내려가는 것은 창피해서, 올라가는 것은 감당이 안될까 늘 두려웠다. 내 안에 찔러본 탐침을 꺼내본 결과, 무슨 욕망이 있는지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어떤 상황이 와도 버틸 수 있는 잔근육은 생겼다. 세상은 노동자의 삶은 네 것이 아니라고, 빨리 그곳을 빠져나와 너만의 인생을 살라고, 대기업은 사회악이니 더 좋은 일을 하며 살라고 아우성이다. 하지만 내가 살아온 삶도 내가 머물고 있는 사회 안팎에서 긍정적 영향을 미치며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안정적인 조건에서 내가 하는 고민들은 배부른 소리라는 주위의 시선이나 스스로의 힐난에 의해 나에 대한 깊은 성찰은 차단되곤 했다. 고민은 많았지만, 홍수에 떠내려오는 장롱 문짝처럼 빠르게 흘러가버리고 내 정신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작가의 말, 208-209쪽)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무의미해 보였던 반복 중에 깊이 없이 시도했던 나의 걸음들이 조금의 흔적은 남겨주었다. 이제 바깥에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정체 모를 욕망을 찾아 헤매던 시선을 거두어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찾아보는 일에 집중하고 싶다. 아무리 부족한 역량을 갖춘 팀원이 와도 좋은 성과를 내는 팀을 유지하는 일, 승진이든 강등이든 표류이든 어떤 자리에서도 멋진 선배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일, 남성들만 득실대는 제조업계에서 여성의 지위 확보와 향상을 위해 내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일 등.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5년 후에도, 10년 뒤에도 겉으로 보기엔 지금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최소한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 느끼던 ‘나에게 아무 변화가 없다는 착각과 불안감’은 쉽게 떨쳐낼 수 있을 것 같다. 제자리걸음도 운동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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