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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between Feb 10. 2019

섹스씬보다 파격적인 건

넷플릭스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를 보고 

올해 1월, 넷플릭스로 공개돼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영국 드라마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원제: Sex Education)'.

열여섯 살 주인공 오티스(Asa Butterfield)의 집은 범상치 않다. 희귀한 성인용품이 가득하고, 카마수트라의 노골적 섹스 체위 그림들이 벽을 수놓는다. 그의 집은 섹스 치료사인 엄마의 오피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엄마의 존재를 숨기고 싶어 하는 오티스. 하지만, 엄마의 상담을 귀동냥한 덕에 그는 학교 친구들의 ‘성 고민 상담사’로 활약하게 된다. 주목받지 못하던 그가 하루아침에 ‘핵인싸’로 거듭난 것. 

10대의 성생활을 파격적이면서도 가볍지 않은 시선으로 그려낸 것도 좋았지만, 이 드라마에서 무엇보다 파격적이었던 건 인종, 젠더, 성적 지향 등에 있어 사회적 소수자를 그려내는 방식이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나 ‘서치’처럼 아시아인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의 성공이 크게 회자되는 건, 여전히 대부분의 할리우드 영화는 백인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음을 반증한다. ‘브로크백 마운틴’처럼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퀴어 영화가 의외로 LGBTQ(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렌스젠더) 커뮤니티로부터조차 비판받은 건, 동성 간의 사랑을 현실에서 벗어난 판타지 공간인 ‘브로크백 마운틴’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는 적어도 이러한 비판으로부터는 자유로울 것으로 보인다. 

먼저, 주인공 오티스의 단짝 친구 에릭(Ncuti Gatwa)은 흑인이며 게이다. 기존 많은 작품 속 게이 캐릭터가 여성 주인공들의 ‘특별한 친구’ 혹은 퀴어물의 ‘비극적 주인공’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면, 이 작품에서 에릭은 ‘이성애자 백인’ 오티스의 둘도 없는 단짝 친구다. 매력적인 이성(동성)에 관해 이야기하고, 방과 후 놀러 다니는 둘의 모습은 보통의 고등학교 친구들과 다르지 않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에릭이 “So hot”이라며 오티스에게 말하는 대상은 남자이고, 에릭의 생일엔 오티스도 함께 여장을 하고 '헤드윅'을 보러 간다는 정도. 오티스와 에릭은 때론 다투고 또다시 화해하지만, 에릭이 게이이고 흑인이라는 사실은 그들의 다툼과 아무 관련이 없다.


여주인공 메이브(Emma Mackey)의 남자친구인 잭슨(Kedar Williams-Stirling) 역시 흑인이다. 그는 교내에서 모두의 인기를 한몸에 받는 학생회장이며 촉망받는 수영 선수로 그려진다. 그는 두 명의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흑인과 백인 레즈비언 커플이다. 작품 속에서 잭슨이 흑인이라서, 레즈비언 어머니들 아래 자라서 겪는 갈등이나 슬픔은 없다. 수영 교내 대표인 자식의 성공을 본인의 성공과 동일시하는 어머니와의 갈등이 극심할 뿐이다. 이는 여느 ‘이성애자’ 부모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심지어 ‘백인’ 여주인공인 메이브는 잭슨의 집을 방문하고, 좋은 환경에서 부유하게 잘 자란 그에게 기가 죽어 식사 도중 집을 나가버린다. ‘흑인과 백인 레즈비언 어머니’라는 환경이 부러움의 존재로 묘사되는 지점은 낯설게 느껴질 지경이지만, 그들을 그려내는 드라마의 시선은 담담하다.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걸, 이토록 자연스레 그려냈던 드라마가 있었던가. 


영국이나 미국 등 서구 문화권과 우리의 문화는 분명 다르다. 하지만, 우리 미디어의 콘텐츠는 여전히 지나치게 ‘한국 순혈주의’와 ‘이성애 중심’의 프레임에 갇혀있진 않은가. 


베트남계 이주 여성이, 동성애 커플이 차별에 힘들어하고 눈물을 흘리는 비극적인 존재로만 그려질 때, 우리는 그들을 우리와 다른 존재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우리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도 그들이 그냥 누군가의 어머니로, 누군가의 친구로, 주인공으로 자연스레 등장하는 날을 꿈꾼다. 그들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가 발 붙이고 서있는 이 현실 속, 누군가의 어머니이고 아들이기 때문이다. 


‘다문화 가정’, ‘게이’, ‘레즈비언’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타자화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누군가임을 자연스럽게. 아무렇지도 않게. 무심하게. 그려내고 또 받아들이는 시선. 이것이 그들을 차별하지 말라는 말보다 훨씬 더 강력할지 모른다.


2014년 SBS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지해수(공효진)가 트렌스젠더 환자를 아무렇지 않게 ‘그녀’라고 부르는 걸 봤을 때의 신선한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앞으로는 그러한 시선이 더는 신선하지도, 충격적이지 않기를. 그저 당연해지기를.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 무심하게 우리 모두를 끌어안는 그 따뜻한 시선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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