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프라를 취미로 가지고 몇 개월 뒤 생각해보니, 학교에 다니던 시절, 아침마다 어머니가 일어나라고 할 때마다 했던 "5분만 더"와 같은 짓을 건프라를 하면서 똑같이 하고 있었다.
"한쪽 다리만 더 만들어야지.. 허리 부분은 간단하니 이거만 더.. 허리까지 만든 김에 몸통까지 더... 더.."
시간은 계속 흐르고, 한 번 시작한 건프라 조립은 멈추지 않는다. 만들기 시작한 이 건프라를 완성하지 못하면 큰 일이라도 일어날 것 같다. 스스로가 꼭 "이걸 당장 완성해야 돼"라는 강박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다 늦은 시간에 "이제 좀 자!"라는 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무섭게 날아오는 와이프의 등짝 스메시에 정신을 차리고, 완성하지 못한 건프라를 두고 잠을 청한다. 잠에서 일어나 보면 걱정하던 "큰 일" 같은 것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일어나기 힘들 정도의 피로가 쌓여있고, 그 피로로 인한 짜증만 얻게 되었을 뿐이다.
나는 건프라뿐만 아니라 일을 할 때도 오늘 시작한 일은 꼭 마무리를 하거나, 어떤 일이든 시간이 허락되는 만큼 최대한 많이 해 놓곤 했다.
시작한 일을 그때그때 마무리하는 것이 나쁘진 않다. 하지만 모든 일은 크게 두 가지 일로 나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했다. 바로 하루 만에 해결할 수 있는 일과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은 꼭 시작한 그때 끝내야 할 필요는 없다. 이런 일들은 지금 이 순간 빨리 끝내는 것보다,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일들을 꾸준히 하기 위해서는 페이스 조절이 필요하다. 한 번에 너무 많은 힘을 쏟으면 그 일이 버겁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하루 만에 하기 버거운 일을 해내면 힘들던 것들이 싹 잊혀지며 만족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만족감에 중독되어 이런 무리한 행동을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 지처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흔히 말하는 burn out 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하루 만에 하기 힘든 일을 하게 된다면, 그 일이 다른 것을 하기 위한 소중한 시간까지 침범하게 될 것이다.
퇴근한 이후 또는 주말에나 만들 시간이 있는 건프라 역시 내겐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일에 속한다. 그래서 나는 건프라에 지치지 않고, 건프라로 인해 다른 것을 하기 위한 소중한 내 시간이 희생되지 않기 위해 하루의 작업량을 나눠서 하고 있다. 오늘 하루는 왼발, 내일은 오른발, 그다음 날은 허리와 같이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괜찮아 이건 오늘 안에 완성하지 않아도 돼."
건프라를 통해 오늘 안에 할 일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을 나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회사에서도 맡고 있는 일을 나눠서 생각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일을 늦은 시간까지 붙잡고 있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나만의 저녁시간을 더 많이 가질 수 도 있었고, 스트레스도 덜 받으며 심지어 더 좋은 퀄리티로 일을 완성할 수 있었다.
오늘 만들고 있는 건프라를 오늘 완성하지 않는다고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꾸준히 하지 않으면 완성되지 않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