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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점 리스본 Dec 18. 2021

우정편지] 마롱이 물속깊이에게

- 아홉번째 편지 : 글에, 그림에 어떻게 체온을 넣을까

와하하, 이번 편지는 미풍이 아니라 강풍입니다. “서점 리스본 아세요? 저, 브런치에 편지 쓰고 있어요.” 읽을 때 깜짝 놀랐어요. 물속깊이님 답지 않아서요. 김연수 작가님은 물속깊이님을 춤추게 만드네 하며 소리 내어 웃으면서, 함께 김연수 작가님 뵈러 가지 않기를 잘했네 했습니다(물속깊이님은 정신줄을 놓아 버렸으니 부끄러움은 제 몫이 될 것 같아서요). 그러면서도 작가님이 우리 편지를 하고, 기대도 해봅니다. 


김연수 작가님 특집, 좋네요. 저도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가파도는 오래전에 가 보았는데, 살고 싶은 곳이었어요. 관광객이 많아도 마라도와 다르게 소란스럽지 않고 평평한 지대도 인상 깊었고 삼겹살을 생미역에 싸서 먹는 것도 배웠답니다. 청보리 축제가 한창인 5월에 갔는데, 바람 따라 일렁이는 보리 구경만 하다 왔죠. 아, TV에도 나왔다는 파랑 눈썹 진돗개도 만났어요. 가만, 바람이라니······ 작가님이 말씀해주시고 물속깊이님이 전해주신 ‘작고 가벼운 새들’ 이야기가, ‘바람에 밀리고 밀리면서도 어쨌든 가고자 하는 쪽으로 바람을 타는 새들은 우리 사는 것과 똑같다.’와 “계획은 대충하되 방향은 잃지 말자.”라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아니 그래야만 감염병 시대를, 변화하는 시대를 살 수 있겠다 싶으면서도 감염병만 염려되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읽은, 전 세계 17개국 선진국을 대상으로 삶에서 가장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한국만 유일하게 ‘물질적 행복’이라고 답했다는 기사가 생각난 까닭입니다. 대부분 국가에서도 물질적 행복은 5위 안에 들었지만, 1위는 우리가 유일했대요. 17개국 중 14개국에서 가족이 1위였고, 설문에 참여한 1,006명 중 62%가 단답형으로 응답한 것도 다른 나라에서는 단답형 비율이 34%인 것을 보면 특이하다고 했어요. 같은 질문을 받으면 제 답은 무엇일까 싶지만, 하나만 체크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하나만으로는 균형 잡힌 삶은 어려울 것 같고, 균형이 없다면 가치 또한 희미해질 것 같아서요. 아, 질문에서 ‘가장’이 눈에 띄네요. 그렇다면 염려할 일은 아니네 하다가 물질적 행복을 우려한 이유를 톺아봤어요. 물질적 행복은 마실수록 갈증이 더해지는 탄산음료가 아닐까 해서요. 이만큼이면 될 것 같아도 다른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알면 내 것은 갑자기 작아 보여 만족이 어려울 것 같아서요. 


여기까지 쓰다가 또 웃었습니다. 이번에는 아까 명랑함과는 다른 웃음이에요. 


지난 일요일에 석파정에 다녀왔어요. 석파정은 흥선대원군 호 ‘석파’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사랑채 옆에 약 650살 먹은 소나무 ‘천세송’을 살펴보는데, 나무는 옆에 다른 나무가 없어서인지 위풍당당이 아니라 넓은 그늘을 자랑했어요. 그늘이 한 20평 정도 된다는 설명을 읽다가, 뭐야 신혼부부가 살만한 넓이네 했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파트 가격, 팍팍해지는 살림살이, 집값 때문에 결혼을 포기한다는 젊은이 등 결혼적령기 아들이 둘 있는 엄마로 내 안에 있는 불안이 저도 모르게 나왔나 봅니다. 


석파정에는 단풍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는데 천세송만큼은 아니어도 근사한 소나무를 몇 그루 만났고, 모두 7개를 찍어야 하는 스탬프 투어도 끝냈고, 고종이 자고 갔다는 별채 마루에도 앉아 봤어요. 정남향이라 해가 어찌나 잘 드는지 눈이 부셨는데 따뜻하니 좋았습니다. 임금이 묵었다는 방 크기는 아담해서 배구 선수 김연경이 그 방에서 자야 한다면 대각선으로 누워야 할 거예요. 혹시 처마 끝에 풍령이 있나 살폈지만, 없었습니다. 풍령은 황정은 작가님 에세이 <일기>에서 “천지영이 창을 열었을 때 풍령에 달린 실이 끊어졌다. 라는 문장을 쓰고 좋아서 며칠 온화한 기분으로 살았다.”라는 문장 덕분에 기억해요. 


집에 오면서 서점 리스본포르투에 들렀어요. 서점 이사한 지 좀 됐는데도 가 봐야지 가 봐야지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해를 넘기겠네 싶어서요. 서점 앞에 서니 제주에 온 것 같네요. 연남아파트 빨랫줄에는 빨래가 널려 있고 서점 옆 골목은 조용해요. 1층과 2층에는 책이 아주 많아졌더라고요. 날이 따듯해서 마당에 앉아 감나무도 구경하고 싶었지만, 일행이 있어 <그림에 부치는 시>(김환기)만 데리고 왔어요. 


잠깐, 말 나온 김에 <그림에 부치는 시> 보고 왔습니다. 


책이 어찌나 가벼운지, 참새 한 마리가 손안에 있는 것 같아요. 부드러운 주홍 뿔에 눈웃음 짓는 사슴이 빨강 열매를 물고 있는 띠지가 무척 마음에 듭니다. 환기미술관에서 나온 100쪽도 되지 않는 책은 반은 영어지만, 아쉽지는 않아요. 도록이나 전시에서 만나지 못한, 어쩌면 화가의 에스키스(esquisse)일 것 같아서요. 초겨울 밤, 귤과 어울리는 책을 앞에 두고 친구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그림에 부치는 시>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서점 리스본에 가야 할 일이 또 생겼습니다. 


“한 아름 되는 백자 항아리를 보고 있으면 촉감이 동한다. 싸늘한 사기(砂器)로되 다사로운 김이 오른다. 사람이 어떻게 흙에다가 체온을 넣었을까.”(같은 책. 16쪽) 어때요, 물속깊이님. 문장이 마음에 드나요. 


저는 ‘사람이 어떻게 글에다가, 그림에다가, 노래에다가 체온을 넣었을까’하고 읽어봤답니다. 그러자 물속깊이님 편지에, 지난번 제주 여행 이후에 그리고 있는 오름 그림에, TV 예능 프로그램 슬기로운 산촌생활에서 배우 정문성과 전미도가 불렀던 ‘사랑이란’ 노래에 담긴 온기가 느껴졌어요. 온기가 많은 사람은 겨울이 되어도 춥지만은 않겠네요. 그러자 또, 온기 부자도 되고 싶어졌습니다. 온기를 받고 전하고 나누다 보면 온기는 더욱 커질 테니까요. 물속깊이님이 김연수 작가님 뵙고 와서 제게 작가님 특집 편지를 써 준 것처럼 말입니다. 


12월이에요. 9월에 첫 편지를 썼는데 가을에 이어 겨울에도 편지를 쓰니 좋습니다. 라고 쓰는데 서점 리스본 비밀책이 왔습니다. 크리스마스 오너먼트 선물도 있어요. 비밀책 잠깐 구경하고 9개 오너먼트를 초록 실에 꿰어 꼬마전등이 있으면 더 예쁘겠네 하면서 책상 옆에 붙이는데, 어릴 때 종이 인형 놀이하던 생각도 났어요. 그림이 정말 귀엽네요. 물속깊이님도 받으셨죠. 저는 특히 왼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삼색 크리스마스 나무가 마음에 쏙 들어요. 


이렇게 온기가 또 생겼어요. 올겨울에는 차곡차곡 온기 일기를 써 볼까요. 물속깊이님 다음 편지는 대설(大雪) 지나서 오겠네요. 눈 소식과 상관없이(코로나 뉴스와 상관없이) 기쁘게 천천히 기다리겠습니다. 건강해요, 우리. 2021년 12월 1일. 마롱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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