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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날덕 Feb 08. 2024

6. 대장 내시경은 힘들어

아찔한 첫 경험의 추억

안녕하세요 무라카미 씨, 오늘은 지난 주제에 이어 다시 건강검진 이야기입니다.


지난주에는 글을 쉬었습니다. 건강검진 전날이었거든요. 건강검진 전날이 왜 글을 한 주 쉬어가는 핑계가 되는가 - 하니 이번 건강검진에는 대장 내시경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검진 한 달 전쯤 건강검진 센터로부터 발송된 박스를 하나 받았습니다. 거기엔 쿨프랩이라는 전처치용 세장제 박스와 함께 대장 내시경 안내 팸플릿이 들어있었어요. 안내서에는 3일 전부터 잡곡밥, 식이섬유가 들어간 채소류, 고춧가루나 씨 있는 과일류, 견과류 등을 먹지 말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만약 이와 같은 음식들로 인해 장내에 무언가가 남아 있다면 내시경이 잘 수행되지 않을 수 있다는 은근한 협박성의 멘트와 함께요. 건강검진이야 회사가 돈을 내준다고 하더라도, 이 대장 내시경은 제가 따로 20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받는 만큼 실패할 수 없었습니다. 실패하기엔 너무나 아까운 비용이었거든요. 저는 착실히 가이드를 따르기로 했습니다.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참교육은 돈이라는 깨달음도 덤으로 얻었구요.


건강검진은 화요일 오후였습니다. 전날인 월요일엔 두 가지 고비가 있었는데요, 하나는 제가 요즘 하고 있는 운동 프로그램인 Stronglifts 5x5의 운동 날이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회사 팀 내 워크숍이 있었다는 것이었죠. 사실 팀 내 워크숍이야 뭐 낮에 하는 것이고 하니, 팀 점심에만 가볍게 불참하고 흰죽을 먹으면 되었습니다. 조금 더 걱정이었던 건 운동이었어요. stronglifts 5x5는 5가지 운동을 A, B 두 가지 루틴으로 나누어 주 3회 무게를 드는 프로그램인데, 이게 소위 이야기하는 스트렝스 프로그램이다 보니 기력이 없으면 너무나 힘듭니다. 과연 흰죽(따위)만 먹고 힘을 쓸 수 있을까 싶었죠.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도 어렵지 않게 완료했습니다. 역시 프리워크아웃 파우더에 듬뿍 들어 있는 카페인과 크레아틴의 힘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만, 저를 잘 아는 주변인의 의견으로는 그간 쌓아온 제 배둘레햄+체지방률 30%의 공덕이라고 하더군요. 


내시경 가이드에는 새벽 6시부터 쿨프랩산을 500ml씩 타서 쭉쭉 들이키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월요일의 두 가지 난관도 잘 넘었고, 어차피 저녁도 흰죽인 데다 술도 못 마시고 해서 저는 잠자리에 일찍 들었습니다. 쿨쿨 잘 자고 일어나 보니 어이쿠야, 아침 일곱시네요? 운동으로 인한 피로와 더불어 간만의 제시간 취침이 숙면을 유도한 것이었습니다. 일단 잽싸게 쿨프랩산 500ml를 타서 벌컥벌컥 들이켰습니다. 맛은.. 음 찝찌름한 레몬향 물이더군요. 못 먹을 맛은 아니었습니다만 딱히 반가운 맛도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이미 한 시간이 늦어버린 것이었습니다. 6시부터 30분 텀으로 500ml씩 4번 마시고, 마지막 한 시간에 물 1L를 마셔야 하는데 이를 어떡한다? 결국 저는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자격증(PMP)을 따면서 배운 크런치 모드를 적용하기로 했습니다 -라고는 하지만 별거 아니고 그냥 20분 텀으로 쿨프랩산을 500ml씩 먹고 남은 40분에 물 1L를 마시는 스케줄로 돌입했습니다.


세상 많은 가이드에는 대체로 이유가 있습니다. 쿨프랩산을 30분 간격으로 500ml씩 먹으라는 데에도 이유가 있는 거더군요. 단지 10분 줄였을 뿐인데, 저는 제가 만든 셀프 물고문의 늪에 빠져 버렸습니다. 모든 일에는 인풋이 있는 만큼 아웃풋도 있는 것이죠. 하지만 특히 이 프로세스는 정말 인풋만큼의, 혹은 그 이상의 아웃풋을 확실히 만들어 주는 작업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쿨프랩산과 함께한 두 시간 동안 저는 인간 호스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되었죠. 하지만 어찌 되었든 해내고야 말았습니다. 너덜너덜해진 기분으로(기분입니다. 기분 맞습니다.) 모든 걸 마무리하고 건진 센터로 향하던 그 성취감이란 이루 말할 건덕지조차 없이 사소했습니다. 


다행히 건진은 빠르게 진행되었고, 수면으로 위+대장 내시경을 받았습니다. 받는 절차는 위내시경과 큰 차이가 없더군요. 간단히 문진하고, 가스제 먹고, 몸에 수액이 들어갈 바늘구멍을 만든 다음, 내시경실로 들어가 침대에 모로 눕고 마우스피스 물고 나면 끝. 차이가 있다면 엉덩이가 뚫려 있는 바지를 입는다는 것과, 끝난 뒤 젤 때문인지 엉덩이가 축축했다는 점(...) 정도였습니다. 다행히 헛소리도 하지 않은 것 같고(마우스피스를 물고 있으니 아마 헛소리를 하더라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겠죠, 제발), 특별히 이상이 없다는 설명도 들었습니다. 후우 다 끝났다, 하지만 별로 다시 하고 싶지는 않군, 하며 깃털 같은 마음으로 건진 센터를 나섰습니다. 그리고 남대문에 걸어가 씨앗호떡과 잔치국수를 먹고, 저녁으로 신나게 스테이크를 구워 와인을 마셨더랬죠. 


그날 밤 꿈에 꼬챙이에 꽂혀 뱅글뱅글 돌아가는 통돼지 바비큐를 봤는데, 괜히 찜찜한 건 역시 그냥 기분 탓이겠죠?





이런 느낌이었는데 꼬챙이 위에 있는 게 아니라.... (출처: https://www.ebay.com/itm/372948163067, Harbour Sig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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