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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민송 Sep 01. 2016

여행을 받아 적다

[녹취록] 제주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 안에서 녹음한 여행 곱씹기

여행이란 프레임은 참 신기해서, 되게 아무렇지 않게 넘기던 일상의 것들도 참 반짝반짝하게 만든다.

평소 같으면 버스를 환승해야 해서 정류장에 내렸을 때, 어어엄~청나게 불어대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온갖 방향으로 휘날리는 것은 내가 그다지 즐기지 않는 경험이었을 텐데. 더구나 그 정류장에서 버스를 오래 기다려야 한다면 더더욱 그랬을 텐데. 단지 여행지란 이유로, 여행이란 눈으로 봤다는 이유로 이것은 나에게 꽤나 낭만적인 순간이 된다.


오현중고등학교 정류장. 만약 버스가 빨리 왔다면 난 그냥 이곳을 스쳐 지나갔을 텐데, 버스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와준 덕에 나는 평소 같으면 인지도 못하고 넘어갈 정류장의 의자가 미소 지어질 만큼 새파란 색이라는 것도 알게 되고, 문득 들려오는 쉬는 시간 종소리에 이곳이 정말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라는 것도 알게 된다.


게다가 종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학생들의 환호성. 그 소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며 내 고등학교 시절, 잠시 잊고 있었던 그때의 기억 한 자락도 끄집어낸다. 맞아, 저때는 쉬는 시간 종이 쳤었지. 나도 저렇게 기뻐했었는데. 정말이지 여행이란 프레임이 씌워지면 오감이 평소보다 5배는 확대되는 것 같아, 이런 소소한 것들이 다 하나하나 느껴지기에 너무나도 좋다.


또 그렇게 오래 기다린 버스를 타고 보니 버스에 사람이 너무 많아 나는 지금 버스 문 앞 계단에 서 있지만, 지금 이 계단 앞에 서 있을 수 있다는 사실도 너무 좋다. 여기 서있으면 버스가 가는 방향 그대로 가장 넓고 탁 트인 창으로 제주 풍경을 바로 볼 수 있으니까. 어쩌면 최고의 전망대 자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사실 나는 원래 부끄러움을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여긴 해외가 아니라 한국인지라 내가 이렇게 중얼중얼하는 말들을 사람들이 다 알아들을 수 있어서, 부끄러움을 1은 아는 나는 마치 친구와 전화하는 것처럼 하려고 기껏 이어폰까지 꼈는데, 막상 이어폰을 끼고 나니 끼기 전보다 주변 소리가 아주 조금 안 들린다고 바로 용기백배하여 부끄러움을 1도 모르고 이렇게 그냥 독백하듯 말하고 있다.


하지만 어떡해, 녹음해두고 싶은걸. 글로 쓰고 싶지만 아무리 나라도 달리는 버스에서 서서 글을 쓰는 것은 조금 무리이기에, 이렇게라도 기록해놓고 나중에 아 맞아 그랬지 하면서 받아라도 적고 싶은 걸.


좋다. 오늘도, 지금 이 순간도.


그리고 또 하나, 여행을 오면 느끼는 점. 사실 내가 방금 겪은 그 일들이 꼭 여행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건 아닐 텐데. 여행지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닐 텐데. 조금만 다르게 보면 나의 평범한 일상도 사실 이처럼 아름다웠을 텐데.


다시 돌아가거든 여행의 프레임을 벗지 않고 이렇게 나의 일상을 보듬어 볼 수 있길. 만약 그게 힘들다면 평소에는 일상을 살아가다가도, 때때로 한 번쯤은 여행의 프레임으로 일상을 바라보길. 그래서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다는 걸 한 번씩은 또 이렇게 깨달을 수 있길.


16.08.31 (수) [여행감성녹취록]

- 돌아온 일상에서 여행을 받아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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