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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야 Apr 30. 2019

그럼에도 기대고 싶은, 나의 애증

영화 <미성년> 을 보고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빠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 바람 난 여자는 임신까지 했단다.
세상에. 하필이면 그 여자의 딸과는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다.
엄마는 절대 알면 안 되는데, 그 애가 엄마한테 말해버렸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 인터넷에 이런 글이 올라오면 각 사이트는 온갖 욕으로 도배가 될지 모른다. 영화 <미성년>의 줄거리다.     




모범생 주리(김혜준)는 심란하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데 당당히 따질 수도 없다. 엄마 귀에 들어 갈까봐 최대한 참고 또 참는다. 그런데 윤아(박세진)는 뭐가 잘났는지 대뜸 주리의 엄마에게 죄다 불어버린다. 열 받은 주리는 윤아의 머리채를 잡고, 두 사람은 육탄전을 벌인다. 근데 이게 웬일. 주리의 엄마, 영주(염정아)가 윤아의 엄마 미희(김소진)를 밀어 넘어뜨려서 병원에 있다는 연락을 받는다. 아마 딸들의 성격은 엄마를 닮은 모양이다. 


어쨌든 아빠(김윤석)는 병원으로 올 수밖에 없다. 들켰으면서도 끝까지 아닌 척하는 아빠는 영 모양새가 빠진다. 어이가 없지만 주리는 병원에 계속 드나든다. 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조산으로 인해 작디 작은 몸뚱아리지만 살아 있다. 주리와 윤아는 태어난 남동생을 보며 동질감을 느낀다. 


하지만 모든 사실을 알게 됐으면서도 어른이란 이유로 내색하지 않으려는 영주는 속이 타들어간다. 남편을 용서할 수 없다. 미희가 원망스럽다. 불륜의 끝을 보고 좌절하는 그녀의 모습을 구경이나 하고 싶은데, 막상 미희를 보니 그럴 수도 없다. 갓 출산을 하고 몸도 추스르지 못한 그녀를, 현실을 깨닫고도 허허 웃는 그녀를 미워하지 못하겠다. 나쁜 건 남편인데, 상처 받는 건 가족들이다.      




영화는 찌질한 남편을 둘러싼 가족들의 감정을 담백하게 풀어낸다. 가볍지도 않고 과장하지도 않는다. ‘미성년’인 주리와 윤아는 무모하게 굴지 않는다. 아빠를 보며 소리를 지르지도, 왜 그랬냐고 따지지도 않는다. 임신해놓고 마냥 좋아 죽겠다는 엄마를 보고 화가 난 윤아가 하는 복수는, 그저 폭로 문자 보내기다. 주리의 핸드폰으로 영주에게 두 사람의 불륜을 확 말해버리기도 한다. 윤아는 두 사람을 마주보고 그 사실을 터뜨릴 용기는 없다. 결국 화살은 자신에게 돌아오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주리는 윤아보다는 조금 더 적극적이다. 몰래 미희의 식당을 훔쳐보고, 먼저 윤아의 머리채를 잡기도 한다. 미희를 찾아가는 것도, 유골함을 들고 윤아를 먼저 찾아가는 것도 주리다. 그래도 화를 내지는 않는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슬플 사람이 엄마인 영주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영주의 감정은 조금 더 복잡하다. 속상하지만 세상이 무너져라 화를 내고 울 수도 없다. 어쨌든 그녀는 ‘어른’이고 지켜야할 가정이 있다. 눈앞에 불륜녀의 아이가 앉아 있는데도 끝까지 밥을 챙겨 먹으라고 말한다. 결국 그 아이에게 눈물 닦을 휴지를 건네받았으면서도 영주는 어른다운 조언을 건넨다.     





미성년과 어른, 그 경계에 선 우리들


흔히 미성년은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어른은 감정 컨트롤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일들을 겪고 어른이 되고 나면, 사소한 일들에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미성년>은 그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      


주리와 윤아는 ‘미성년’이지만 이 상황에 꽤나 이성적으로 대처한다. 일단 엄마의 귀에 불륜 소식이 들어가지 못하게 차단하려 애쓰고, 상대방의 직장 위치를 파악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을 요구한다. 남동생의 사후를 신경 쓰는 것도 두 사람이다. 엔딩의 다소 엽기적이지만 도발적인 행동 역시, 직관적이고 순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영주와 미희, 대원은 ‘어른’이지만 꽤나 감정적이다. 불륜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기 때문이겠지만, 대원은 시종일관 모든 문제를 회피하며 찌질한 행동을 보인다. 마지막에 택시비를 안 내려고 버티는 것까지도 어른답지 못하다. 




미희 역시, 딸인 윤아 보다 어린 태도를 보인다. 불륜으로 임신을 하고서도 마냥 행복하고, 그것이 사랑이라 굳게 믿는다. 딸의 앞에서 엄마답게 성질을 부리기도 하지만 단호한 딸의 태도에 우는 소릴 한다. 대체 어떻게 어른이 된 걸까, 의심이 가지만 전남편을 보니 그런 어른이 한 둘은 아니겠다는 생각도 든다. 불륜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확인한 미희는 전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 미희는 사랑에 빠져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어른이었을 뿐이다. 사랑을 떼어놓으면 그녀의 태도는 우리가 흔히 아는 어른과 다르지 않다. 


영주는 이들 중에서 가장 어른스럽다. 불륜을 알고 나서도 아무 일 없는 척 애를 쓰고, 아이들을 보듬고 불륜녀에게 죽까지 만들어준다. 전생에 위인이었나 싶을 정도로 넓어 보이는 마음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무너진다. 외면했던 현실을 더 이상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이혼이라는 강수를 두지만, 핑계가 생기니 다시 원위치다.      


한껏 어른인 척 해보지만, 현실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건 결국 어른이다.  



‘미성년’들은 문제가 생기면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반면, 
‘어른’들은 문제를 감추고 상황을 회피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미덕인 것처럼, 자신의 감정은 깊숙한 곳으로 억누르고 겉으로 보기에 아무 문제없는 모습을 연기한다. 소리 내어 엉엉 우는 건 아이 같다고 말하고, 뭐든 내색하지 않으려는 것은 어른스럽다고 말한다. 문제가 생겨도 곪아 터질 때까지 모른 척하려는 태도는 자신을 갉아먹을 뿐임을 알면서도. 


가끔은 어른들은 모두 어른을 연기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시간이 흐르면 법적으로는 성인이 되지만, 정신은 자신이 원하는 시기에 머물러 있다. 어른이라는 단어에 갇혀 미처 커버리지 못한 미성년의 모습이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저러한 주변 상황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올곧이 자신의 마음에 따라 행동하고 싶은 그때를 떠올리게 되는, 영화 <미성년>이다.             




+ 사담. 

1. 이번 리뷰의 제목은 '영주'의 태도에 초점을 맞추었다. 

2.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있는 톤 유지. 도발적이고 유머러스하면서도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3. 감독님의 차기작을 기대하게 만드는 멋진 영화. 

4. 배우들의 연기는 말 할 필요도 없다. 각자의 에너지와 색이 분명하다. 

5. 비운의 상영 시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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