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물약과 음식은 어떻게 게임을 바꿨나?

먹고 마시는 아이템에 깃든 디자인, 심리, 역사

by 신영

빨간색이냐 파란색이냐, 개발자의 고민

일본의 전설적 RPG 시리즈인 <드래곤 퀘스트>를 기획한 호리이 유지(Yuji Horii)가 한 인터뷰에서 밝힌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초기 개발 단계에서 파란 물약이 체력을, 빨간 물약이 마법력을 채워 주는 방향을 잠시 고려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내 테스트 결과 '빨간색 = 피'라는 직관적 연상이 훨씬 강력하다는 점이 부각됐다. 결국 빨간 물약이 HP(체력)를 회복시키는 대표 아이템으로 확정되었고 이 선택은 이후 무수히 많은 RPG 게임에 그대로 전해졌다.


흥미로운 건 이런 단순한 색 결정이 온갖 밈과 패러디를 낳았다는 점이다. 해외 커뮤니티에서는 빨간 주스를 작은 병에 담아 마시는 모습을 찍어 올리며 HP 충전 중이라 농담을 건네기도 한다. “게임 속 물약을 현실로 가져오면 진짜 힘이 날까?”라는 우스갯소리가 돌면서 소소한 이벤트나 굿즈로까지 발전한 사례도 있다.

이처럼 당연하게만 여겼던 '빨간 물약 = 체력 회복' 공식에는 사실 묘한 문화적 상징성과 UX적 고민이 담겨 있다. 게임 속 빨간 물약과 음식 이야기는 현실과 게임을 넘나드는 의외의 서사를 품고 있는 것이다. 가장 흔한 체력 보충 수단이지만 왜 굳이 빨간색이며, 음식 아이템을 먹는 행위는 또 어떻게 플레이어에게 쾌감을 주는 것일까?


물약과 음식의 문화적, 디자인적 비밀

1) 빨간 물약의 탄생과 상징성

빨간 물약은 여러 고전 RPG를 대표하는 시그니처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해상도가 낮았던 8비트 시절부터 빨간색이 체력(HP)을 나타내는 직관적 코드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드래곤 퀘스트>나 <파이널 판타지> 초기 시리즈에서도 빨간 물약(포션)이 체력을 회복하는 핵심 아이템으로 등장했다. 개발자 입장에서는 '빨간색 = 피와 생명'이라는 이미지를 플레이어에게 즉시 각인할 수 있어 그래픽 자원이 한정된 상황에서도 쉽게 구분 가능했다.

RPG류 게임을 대표하는 아이템, 빨간 물약(Healing Potion)

이후 다른 작품들도 비슷한 색상과 병 모양을 따라가며 게이머들은 더욱 익숙해졌다. 이제는 새로운 게임을 접하더라도 인벤토리에 빨간 병이 보이면 체력 회복용이라고 당연하게 여길 정도다. 이는 문화적 학습 효과이면서 UI/UX 원리에 부합하는 사례다. 일상에서 빨간색이 응급이나 경고 느낌을 주듯 게임에서도 체력과 직결된 중요한 색으로 자리 잡았다.


긴박하거나 치명적인 상태를 표현할 때 빨간색을 사용하기도 한다. <다크 소울> 시리즈의 경우 화면 주변이 빨갛게 물들며 위기 상태를 직관적으로 알려준다. 플레이어는 별다른 설명 없이도 생명이 위급한 상태임을 인지하게 된다.


2) 음식 아이템: 먹는 행위가 주는 즐거움

음식 아이템 또한 체력 회복 수단으로 폭넓게 쓰인다. 판타지풍 RPG에서 빵, 고기, 치킨이 자주 등장하고, 동양풍 세계관에서는 만두나 국밥 같은 메뉴가 눈에 띈다. 근현대 배경에서는 햄버거나 에너지 드링크를 볼 수 있으며 <몬스터 헌터> 시리즈처럼 잘 익은 고기를 강조하는 게임도 있다. 바람의나라 속 일부 지역에서는 주막에서 술을 마시면 HP가 오른다는 설정을 두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음식 아이템이 사랑받는 이유는 현실에서 '먹으면 힘이 난다'는 경험이 이미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음식을 씹는 모션이나 사운드를 사실적으로 구현한 경우 플레이어는 대리 포만감을 느끼기도 한다.

역시 먹는 거 하면 이 이미지를 뺄 수 없다. 천지를 먹다 중간 미션 중 고기 뜯어먹기.

서바이벌 장르로 넘어가면 음식은 더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다. <돈 스타브>에서는 식중독, 유통기한, 조리 과정을 세밀하게 다루며 단순한 회복을 넘어 생존 시뮬레이션의 재미로 확장한다.


반면 대부분의 RPG는 편의성을 위해 '빵 아이템 하나로 HP가 50 오른다.'처럼 간단한 규칙을 채택한다. 현실성을 조금 희생하더라도 플레이 템포를 해치지 않고 즉각적인 즐거움을 주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이다.


3) 현실성 vs 편의성: 어디에 방점을 찍을까

음식과 물약 시스템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구현할지를 두고 게임 기획자들은 끊임없이 고민한다. 음식마다 칼로리와 수분량을 설정하거나 병을 직접 구비해야 물약을 담을 수 있게 만든다면 현실감이 상승한다. 하지만 너무 디테일에 치중하면 플레이어가 과도한 스트레스를 느끼게 되어 게임에 대한 흥미가 오히려 떨어질 수 있다.


결국 게임 장르와 목표에 따라 균형점을 찾는 것이 핵심이다. 예컨대 모바일 RPG(<세븐나이츠>, <쿠키런 킹덤> 등)처럼 빠른 진행이 강조되는 경우에는 빨간 물약 한 병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간단한 방식을 택한다. 반면 하드코어 서바이벌 장르인 <프로젝트 좀보이드>는 물과 음식, 체력과 스태미너를 구분해 생존의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먹고 마시며 회복한다’는 기본 아이디어는 같아도 구현 양상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4) 동서양의 불사약 전설과 현대 게임 포션

빨간 물약이 체력을 채워 주는 설정은 고대부터 이어져 온 '불사의 약 전설'과 은근히 맞닿아 있다. 중국 역사 속에서 진시황이 불로장생 약을 찾으려 한 이야기가 대표적이고, 유럽 연금술 전통에선 엘릭서(Elixir)라는 이름으로 모든 병을 고치고 영생을 주는 약을 연구했다.


이런 전승은 <젤다의 전설> 시리즈나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의 마법 물약 시스템 등에 흡수되어 작은 병 하나로 치명상을 회복하거나 심지어 죽음에서 되살아나는 판타지를 보여준다. 물론 실제 전설 속 불사약은 희소하고 극비에 부쳐지는 반면 게임에선 상점에서 마음껏 살 수 있을 만큼 대중화된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특수한 액체가 생명력을 불어넣는다'는 큰 틀은 유지하며 플레이어는 일종의 신비로운 구원 장치처럼 여기게 된다.


5) 색채와 디자인의 UX 효과

빨간 물약이 체력을 회복시킨다는 공식을 게이머들이 별 이질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색채 심리와 시각 디자인 원리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혈액과 관련된 빨간색이거나 음식 아이콘이 그려진 아이템이라면 '이건 내 캐릭터에게 직접적인 생명력을 준다'라고 직감하기 쉽다.

빨간색은 직관적으로 '피'와 '생명'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일부 학계 연구*에서는 UI에서 빨간색을 볼 때 사람들은 긴장감과 경각심을 느끼면서도 생존 본능과 결부된 강렬한 인상을 받는다고 설명한다. 게임 아티스트들은 이런 반응을 예측해 HP나 치명 상태를 상징하는 색은 대체로 빨간색 계열로, 마법이나 정신력을 연상시키는 파란 계열은 MP(마나)에 할당하는 구분을 자주 쓴다.


게임 속 음식도 마찬가지다. 일러스트만 봐도 먹으면 힘이 날 듯한 맛있는 조합이라는 느낌이 들도록 디자인하는 경우가 많다. <마비노기>나 <테일즈위버>처럼 음식 아이템 종류가 다양한 게임은 빵이나 고기 일러스트에 윤기를 강조해 '이걸 먹으면 진짜 배부를 것 같다'는 이미지를 심어준다.


*Color psychology: Effects of perceiving color on psychological functioning in humans

이 논문에서는 빨간색이 인간의 심리와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포함해 색채 전반이 어떻게 심리적 반응(예: 경계심, 집중도, 흥분도 등)을 이끌어내는지 종합적으로 검토한다.

저자들은 빨간색이 일반적으로 위협, 경고, 긴박함을 상징하기 때문에, 성과 평가 상황(시험지 표지, 스포츠 경기 유니폼 등)에서 빨간색이 주는 부정적 효과, 혹은 시각적 자극 증가 현상 등에 대한 실험적,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다.


6) 장르별 특징: RPG부터 서바이벌까지

정통 판타지 RPG라면 빨간 물약=HP, 파란 물약=MP라는 알기 쉬운 이원화가 가장 흔하다. 음식 아이템은 가끔 버프나 상태 이상 해제 효과를 주는 식이다. 액션 호러 게임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는 붕대나 회복약, 응급처치 스프레이처럼 의료용품을 통해 현실적 긴장감을 더한다. 서바이벌 장르인 <더 포레스트>나 <라스트 데이 온 어스>에서는 포만감 또는 허기와 갈증 수치를 따로 두어 음식을 체력+에너지로 확장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모바일 게임들에서는 UI 간소화를 위해 한두 종류의 회복 아이템만 운영하며 현질(유료 결제) 요소를 결합해 한 번에 HP 전부 회복 같은 특별 혜택을 판매하기도 한다.


이처럼 동일한 체력 회복이라는 개념이, 각 장르와 시대, 디자인 철학에 따라 다르게 변주된다는 점은 상당히 흥미롭다. 빨간 물약과 음식은 단순한 체력 채우기 도구가 아니라 색채, 디자인, 문화, UX, 역사 등 다양한 요소가 뒤섞인 결과물이다.


버그, 밈, 그리고 현실 패러디

빨간 물약과 음식 아이템은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개발자의 사소한 설정 실수나 시스템 버그는 때론 게이머들 사이에서 더 강력한 밈과 놀이 문화가 된다.


1) 무한 체력과 만병통치

물약을 특정 조건에서 무한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버그는 여러 게임에서 발생했던 대표적 버그다. 예를 들어, 블리자드의 고전 액션 RPG인 <디아블로 II> 초창기에 아이템을 복제할 수 있는 버그가 있었다. 일부 플레이어가 이를 활용해 포션을 무한정 늘린 결과 체력이 사실상 깎이지 않는 만병통치 상태가 가능해졌다. 커뮤니티에는 '체력바가 내려가지 않는 전설의 팔라딘' 같은 밈이 퍼졌고 개발팀이 긴급 패치를 진행한 뒤에서야 사태가 진정됐다.


<다크 소울> 시리즈 초기에는 캐릭터가 물약(에스트 병)을 마시는 모션 중 잠깐 무적이 되는 현상이 있었다. 숙련된 플레이어들은 적의 공격 타이밍에 맞춰 물을 마시듯 체력을 회복하고 공격까지 무효화시키는 전법을 구사했다. 이 버그를 활용하면 게임 내 웬만한 보스도 다 때려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2) 유저들의 현실 패러디와 2차 창작

물약과 음식 아이템을 현실에 그대로 옮기려는 시도도 활발하다. RPG계 명작인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에 나오는 포션을 모티프로, 붉은 음료를 예쁜 병에 담아 진열하는 굿즈가 일본의 한 동인 행사에서 큰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참여자들은 병에 'HP +50' 같은 레이블을 붙이고 시음하면서 기념 촬영을 즐겼다.


<몬스터 헌터> 시리즈에서 나오는 '잘 익은 고기' 아이템을 실제로 재현한 레시피 영상들이 유튜브에 올라오기도 했다.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고기를 똑같이 만들어 "이걸 먹으면 정말 힘이 날까?"라는 우스갯소리를 곁들인 것이다. 이런 2차 창작 활동은 게임 외부에서도 먹고 마시며 강해진다는 게임적 상상을 즐기게 만든다.


3) 그 외

아래는 게임 내에서 음식을 다룰 때 예기치 못한 황당한 또는 흥미로운 사례들이다.


- 시한폭탄 고기: <돈 스타브>에서는 음식에 부패 개념이 있어 너무 오래 두면 썩는다. 다만 이 시스템이 초기에 잘못된 계산으로 적용되어 잡은 지 몇 분도 안 된 고기가 순식간에 상해버리는 버그가 발생했다. 플레이어들은 '이 세계 고기는 유통기한이 1분'이라며 웃음 반 울음 반으로 게임을 즐겼고, 이 버그가 수정된 뒤에도 시한폭탄 고기라는 밈이 계속 회자됐다.


- 그린 허브는 먹는 아이템?: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처럼 호러 분위기를 강조하는 게임에서는 상비약(그린 허브)과 식량을 헷갈리거나 잘못 사용하는 장면이 간혹 나타났었다. 실제로는 상처 치료용인 허브를 ‘풀떼기니까 먹을 수 있지 않나?’라고 오해하고 체력 감소 상태에서 한 번에 몽땅 사용해 버리는 식이다.


- 물약 중독자: 어떤 플레이어들은 물약이 부족한 상황을 불안해하며 인벤토리에 과하게 물약을 많이 들고 다니기도 한다. 커뮤니티에서는 이를 포션 과잉 집착이라고 부른다.


- 오색 물약의 함정: 몇몇 RPG에서는 빨간 물약이라도 실은 독약일 수 있고, 파란 물약이 체력을 채우는 반전 설정이 있기도 하다. 플레이어가 고정관념에 빠져 허를 찔리는 경험을 유도한다.


빨간 물약 뒤에 숨은 끝없는 이야기

게임 속 빨간 물약과 음식 아이템이 그저 체력을 채워주는 소모품이라는 인식 뒤에는 의외로 깊은 배경 이야기가 숨어 있다. 단순히 색채와 편의성의 문제를 넘어 UX 디자인, 문화적 전승(불사약), 심지어 게임 커뮤니티의 밈 문화까지 얽혀 있는 것이다. 개발자의 작은 아이디어가 유저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현실 패러디로 이어지기도 하고 뜻밖의 버그가 밈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빨간 물약이 있기에, 오늘도 여러 게임 속 세계는 동작한다.

이렇게 게임 속 작은 사물 하나하나가 풍부한 서사를 품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우리가 게임을 단순한 오락이 아닌 문화로 바라볼 수 있는 중요한 이유다. 특히 빨간 물약과 음식은 먹고 마시는 행위가 지닌 원초적 즐거움을 재현해 주는 동시에 즉각적인 보상 심리를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매력적이다.


만약 누군가 전혀 다른 색의 포션이나 이색적인 음식을 게임 속에 구현해 본다면 어떨까? 이 소소한 상상에서부터 또 하나의 새로운 게임적 상상이나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다. 익숙해 보이는 게임 아이템 하나에도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이 바로 게임이 지닌 매력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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