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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비수 Apr 24. 2022

바라던 바다

허구와 현실 사이의 구름

colored pencil on paper


요즘 즐겨 보는 드라마가 있다.

<나의 해방일지>.

주인공인 삼남매 중 막내인 미정이 내뱉는 독백에 

공감이 많이 간다.

'이런 감정을 나만 느끼는 건 아니구나.'

하고 상대에게 공감을 하게 되면

왠지 모를 위안과 위로를 받는다.


"초등학교 1학년 때 20점을 받은 적이 있어요.

시험지에 부모님 사인을 받아 가야 했는데 꺼내진 못하고, 

시험지가 든 가방만 보면 마음이 돌덩이처럼 무거웠어요.

                                         (...)

뭐가 들키지 말아야 하는 20점짜리 시험지 인지 모르겠어요.

남자한테 돈 꿔준 바보 같은 나인지,

여자한테 돈 꾸고 갚지 못한 그 놈인지, 그 놈이 전 여친한테 갔다는 사실인지.

도데체 뭐가 숨겨야 되는 20점짜리 시험지인지 모르겠어요.

그냥 내가 20점짜리 인건지."


"사람들은 천둥번개가 치면 무서워하는데 전 이상하게 차분해져요.

드디어 세상이 끝나는구나. 바라던 바다. 

갇힌 것 같은데 어디를 어떻게 뚫어야 될지 모르겠어서 

다같이 끝나길 바라는 것 같아요. 불행하진 않지만 행복하지도 않다.

이대로 끝나도 상관없다.

어디에 갇힌 건진 모르겠지만 뚫고 나가고 싶어요.

진짜로 행복해서 진짜로 좋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아. 이게 인생이지. 이게 사는 거지.' 그런 말을 해보고 싶어요."


 첫째 딸 기정이 내놓는 웃픈 대사들도 인상적이다.

대사는 시니컬한데 배우의 연기가 살아서 파닥파닥 움직이는 물고기 같다.


"머리 밀고 싶어요. 시원하게 빡빡. 한번도 머리빨 덕 본 적도 없으면서

무슨 여성성의 상징처럼 아침마다 힘들게 감고, 팔 떨어지게 드라이하고.

아무 의미없는 머리카락에 평생을 시달린 느낌이에요."


<나의 해방일지> 스틸 사진


"날 추앙해요.

난 한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

개새끼..개새끼.. . 내가 만났던 놈들은 다 개새끼.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가득 채워지게.


조금있으면 겨울이에요.

겨울이 오면 살아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게 앉아서 보고 있을 것도 없어요.

공장에 일도 없고, 

낮부터 마시면서 쓰레기같은 기분 견디는 거 -

지옥같을 거에요.


당신은 어떤 일이든 해야 돼요.

난 한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 돼. 

추앙해요."




박해영 작가는 전작인 <나의 아저씨>에서도 그랬지만

대사들이 시 같다.

구어체이면서도 함축과 은유가 담겨

일상에서 느꼈던 온갖 상념들을

사르르 훑어준다.


<나의 아저씨>에서는 좀 더 극단적이었던 주인공 '지안'의 환경, 상황과 비교해

<또 오해영>, 그리고 <나의 해방일지>에서는

엄청나게 불행하지도..

그렇다고 행복하지도 않은

평범한 여성의 시선과 대사로

공감과 위로의 시선을 주고 받는다.


'봄이 오면 그녀도 달라질 수 있을까?'

그녀의 해방을 응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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