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와 현실 사이의 구름
레모네이드라 쓰여 있는 시원스런 깃발이 연꽃밭과 유채꽃밭 사이로 난 길에 서 있었다.
흙먼지 이는 길. 가호는 병을 입에 대고 꿀꺽꿀꺽 소리를 내면서 레모네이드를 마신다.
군데군데 움푹 들어간, 칙칙한 녹색의 두꺼운 유리병.
"아, 시원하다."
목이 짜릿짜릿하다. 눈앞이 온통 흔들리는 연꽃이다. 싱싱하고 푸르른 풀 속에 종이 쓰레기를
뿌려놓은 것처럼 꽃이 피어 있다. 붉은 자주색, 꾸밈없는 꽃이다.
연꽃밭 너머에는 유채꽃이 하염없이 피어 있다. 길쭉한 노란색이 바람에 스민다.
가호는 한동안 그 한적한 풍경을 바라보다가 여기가 어디야, 하고 물었다.
"도쿄의 끝. 도쿄와 치바의 경계쯤 되려나."
나카노의 그 말에 가호는, 오늘은 어째 경계란 말이 많이 등장하네, 하고 생각했다. 발치에 있는 연꽃밭에 드문드문 흙이 드러나 보인다.
불현듯 생각이 나서, 그대로 말한다. 나카노 앞에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무장해제를 하게 된다.
"로봇이 나오는 이야기야. 관람차를 탔더니, 바로 밑에 연꽃밭이 보였습니다, 이렇게. 좀 슬픈 이야기야."
"그랬어?"
"제목이 뭐였더라."
가호는 눈을 찌푸리고 심각하게 기억을 더듬는다. 삽화는 유난히 색이 엷은 수채화였다. 이와사키 치히로였나.
가호와 있을 때면 때로 그런 기분이 든다. 시간의 고리가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다. 자전거를 탄 아줌마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간다.
에쿠니 가오리, <홀리 가든> 중에서
대학생 시절, 에쿠니 가오리의 감성에 흠뻑 빠져서 그녀의 소설을 즐겨 읽었었다.
이 장면을 읽으며, 유채꽃밭을 거닐던 엄마 아빠의 신혼여행 사진이 어렴풋이 떠오르기도 하였고,
'흙먼지'와 '노란 유채꽃', 그리고 '붉은자주빛 연꽃'이 가득한 길을 생각하니
'몽롱하고 나른한 공기'도 떠올랐다.
여기에 레모네이드를 마신 가호가 "아, 시원하다"란 말을 내뱉는 장면을 보고 왠지모르게 창문을 열고 엷은 바람을 쐬고 있을 그녀가 떠오르며 약간은 더운, '봄의 공기'가 떠올랐다.
꽃밭은 내게 어린시절 추억이 깃든 곳여서 일까?
'세살짜리 가호와 서너 살 짜리 자신이 이렇게 서 있는 기분이었다.'
라는 이 문장은, 나로 하여금 어린 시절 추억의 장소로 자동차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떠난 기분마저 들게
하였다.
그래서 현재의 나와 단발머리 꼬마 소녀가 함께 봄의 길을 거니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