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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림 Mar 03. 2024

영웅의 여정



윤은 정말이지 집안에서 증발된 그 어떤 물건 같다. 공간이라고 해봤자 방 두 칸이 전부인 빌라에서 당최 어디 뒀는지 생각나지 않는. 찾으려고 몇 번이고 시도하다가 어차피 집안에 있을 게 분명하니 언젠간 찾겠지 하고 손을 놔버리는. 그러다 어느 날 기척도 없이 눈앞에 위풍당당 모습을 드러내는. 불분명하지만 확실하고 분명하지만 불확실한 애다.


그날도 삼 년 만에 연락 와서는 이민 간다고 했다. 짐도 다 싸두었다고 했다. 한국에서의 남은 날은 내일 하루가 마지막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결국 하려는 말은, 내일 당장 만나자는 거였다. 몇 시에 만날 거냐고 물으니 혜화동의 한 호텔 주소를 알려주며 오전 아홉 시까지 오라고 했다. 아홉 시에 도착하기 위해선 여덟 시에는 집에서 나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일곱 시에는 일어나야 하는데, 내가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약속을 통보하는 윤의 말투는 더할 것 없이 당당했다.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눈을 태연히 깜빡이는 그 어떤 분실물처럼. 원래부터 그 시간에 정해져 있었다는 듯 윤과의 일정은 불분명하지만 확실했다.


윤과 내가 여덟 살일 때 우리는 처음 만났다. 새파란 바람막이에 그것보다 더 새파란 책가방을 어깨에 짊어진 윤과 새하얀 카라티에 그것보다 더 새하얀 책가방을 한 손에 쥔 내가 두 얼굴을 마주 했다. ‘1-2’ 팻말이 덜렁거리는 교실 앞문에 어정쩡하게 서서 누가 먼저 그 문턱 너머로 발을 내딛을 것인지 겨루고 있었다. 새파란 어린애가 용기를 냈고 새하얀 여린애가 뒤를 따랐다. 새파란 애와 새하얀 애는 종종 같이 어울렸고 만남의 장소는 주로 학교 도서관이었다. 하루는 도서 대여가 한 회당 세 권이 최대라는 사실을 새하얀 애가 알아버리던 날이었다. 그때 새하얀 애 품에는 책이 다섯 권이나 들려 있었다. 새하얀 애의 얼굴은 빨간색 물감 한 방울 잘못 떨어트린 것처럼 삽시간에 붉게 변했다. 새파란 애가 새빨간 애 손을 잡고 서가 구석으로 데려갔다. 두 권을 포기하라고 하자 시리즈물이라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새파란 애는 자기가 골랐던 책 세권 중 두 권을 책장에 다시 꽂고 새빨간 애의 책 중 두 권을 나눠 들었다. 다음에 왔을 때 저 책들을 누가 빌려가고 없으면 어떻게 하냐고 묻자 새파란 애는 말없이 등을 돌려 서가를 빠져나갔다. 한 학년이 지나고 둘은 다른 반이 되었다. 각자 다른 친구와 팔짱을 끼고 복도에서 마주치면 새파란 애가 새하얀 애의 어깨를 툭 한번 치는 그런 안부 인사가 오고 갔다. 그렇게 윤과 나는 때에 따라 먼 거리로 늘여졌다가 다시금 가까워고 또 멀어지며 분명하지만 불확실한 우정의 시간을 지나왔다.


호텔방 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츄리닝 입은 윤과 트위드 재킷 입은 내가 두 얼굴을 마주 했다. 둘 중 누가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삼 년 만에 개최된 오늘의 행사 콘셉트가 합의되지 않았다는 점만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방안에는 삼십 인치는 족히 돼 보이는 대형 캐리어가 두 개나 놓여 있었다. 트위드 재킷 따위는 훌렁 벗어서 캐리어 위에 던져 버렸다. 일단은 침대에 드러누워서 행선지를 물어봤다. “어디가?”, “스위스”. 3초간의 정적 뒤에 내가 다시 물었다. “아니. 오늘 우리 뭐 먹으러 가냐고.” 중요한 질문엔 대답도 안 하고 윤은 옷을 갈아입었다. 이른 아침부터 여는 식당이라고는 백반집 밖에 더 있겠냐는 질타에도 윤은 성큼성큼 앞장을 섰다. 골목을 굽어가니 간판도 없는 작은 가게 앞으로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다. 열 시 정각이 되자 가게 문이 열렸고 그 안에서 두건을 쓴 남자 하나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의 안내대로 윤과 나도 자리에 앉았고 메뉴판을 건네받았다. “먹고 싶은 거 두 개 골라. 나 하나 골랐다.” 윤은 말했다. 언젠가의 그날처럼.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윤과 내 앞에는 샐러드와 파스타와 리조또가 놓였다. “이걸 어떻게 다 먹냐.” 거대한 음식의 험산 앞에 주춤거리는 내 옆에서 윤은 포크질을 시작했다. “가격 안 보고 먹고 싶은 거 다 시켜보고 싶었다 너랑.”


명절에 모인 친척들 앞에서 어깨 한번 으쓱거릴 수 있는 이름난 회사에 취직하려고 꼬박 두 해를, 그렇게 목에 건 사원증 무게가 돌덩이 같아서 밤마다 훌쩍이느라 또 한해를. 윤은 배고프고 외롭고 불안하고 두려운 삼 년을 지내다가 다짐을 한 거다. 1학년 2반 교실 안으로 성큼 한 발을 그리고 다른 한 발을 그리고 마침내는 온몸을 투척했던 그 언젠가의 날처럼. 스위스 가서 뭐 해 먹고살지는 아직 모른다는 윤은 내게 스위스로 놀러 오라고 했다. 집 계약은 아직 안 했지만 네가 올 때쯤 되면 잘 곳도 먹을 것도 책임질 테니 비행기표만 끊어서 오라고 했다.


아침 아홉 시부터 나를 불러낸 윤은 밤 아홉 시가 되어서야 나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삼 년의 생을 아니 생의 삼 년을 헤쳐 살아남은 윤의 모험 이야기는 다섯 권의 시리즈물을 능가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소명도 있었고 시련도 있었고 협력자도 있었으며 적대자도 있었다. 모든 여정이 끝나고 영웅은 환대와 함께 귀환. 하지만 영웅의 여정은 늘 그렇듯 끝이 곧 또 다른 시작이므로 윤도 다시금 떠나는 것이다. 불분명하지만 확실하고 분명하지만 불확실한 곳으로. 윤은 내 어깨를 한 번 툭 치는 것으로 작별 인사를 갈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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