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얼룩말 Aug 10. 2023

커스터마이징 시대의 라디오피디

크록스, 케이스티파이, 랜덤다이버시티

 열두 살 난 딸이 방학을 맞아 가고 싶다고 한 곳은 워터파크도 아니고, 롯데월드도 아니었다. 이름도 어려운 <랜덤 다이버시티 Random Diversity>. 무슨 전시회라고 하는데 사진, 뇌파, 추출.. 당최 들어도 알 수 없는 말의 나열이라, 가서 보면 알겠지 하는 마음으로 예매를 했다.


 L 영화관에서 주최하는 이 전시회는 영화를 비롯해서 미디어를 이용해 관람자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랜덤 다이버시티'는 전두엽 뇌파 분석과 감성 컴퓨팅(emotion AI)을 통해, 나의 감정을 세상에 하나뿐인 색으로 치환하는 미디어아트 작품입니다. (전시회 설명 중)


 이 중에서 특히 딸의 관심사는 자기가 고른 특정 사진을 보면서 뇌파를 측정한 다음, 측정 수치를 따라 몇 가지 색을 조합한 용액을 작은 병에 담아, 나만의 이름을 붙이는 <이모션 백신 emotion vaccine>을 만드는 코너였다.


 사진은 자기가 원하는 것으로 선택할 수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돌 사진을 선택하는 것 같았다. VR고글 같은 것을 쓰면 눈앞에 내가 미리 앱에 입력한 사진이 뜬다. 그 사진을 보며 느낌에 집중한다. 그동안 나의 뇌파가 측정되고, 이어서 뇌파 수치에 맞게 색 용액이 조합된다는 설명이다. 


 어쨌든 여기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포인트는 '내가 좋아하는' 사진을 볼 때 활성화되는 나의 뇌파를 구체적 수치로 측정해 준다는 것이며, 이때 나의 느낌, 감정을 - 마치 물감이나 향수처럼 보이는- 나만의 색 용액으로 만들어 이름 붙이고, 저장해서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난 몇 년 간은 이 행사에서 나만의 향수를 만든다든지, 나만의 색으로 반지를 만든다든지, 나만의 음을 만든다든지 하는 다양한 형태의 저장과 소유가 가능했었다고 하는데, 올해는 그저 10ml 유리병에 담긴 색용액이기 때문에 쓸모는 없었다. 하지만 색조합에서 나타나는 미세한 차이가 곧 '나만의 색깔' '나를 표현해 주는 것'이라는 점이 '커스터마이징의 시대'를 새삼 실감하게 했다. 이렇게 나온 나만의 색용액은 인스타그램에 올릴만한, 그야말로 인스타그래머블 그 자체다.


 보는 데 채 30분도 걸리지 않는 전시였지만 입장료는 싸지 않았다. 그래도 관람객은 많았다. 전시를 본다기보다 전시를 '찍는다'는 말이 적합했다. 


 전시를 보고 연결된 대형 쇼핑몰을 둘러보다 핸드폰 케이스 브랜드인 케이스티파이 매장에 들어가 보았다. 비싼 브랜드로 알고는 있었는데 아이는 여기에도 열광했다. 좋아하는 아이돌이 컬래버레이션을 해서 출시한 모델이 있다는 거였다. 케이스티파이 역시 커스터마이징을 강조하고 있었다. 원하는 디자인과 색상을 조합하고 자기 이름도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전에 아이와 약속한 대로 크록스의 지비츠를 사기 위해 크록스 매장에 들렀다. 크록스도, 지비츠도 내 눈에는 영 이상해 보이는데, 지비츠를 고르는 코너에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성황이었다. 요즘 거리를 나가면 다섯에 한 명은 신고 다니는 듯한 국민 슬리퍼 크록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크록스를 신으려면 '나만의 개성'을 표현해 주는 지비츠를 함께 구입하는 것이 센스라고 한다. 


 딸과의 외출에서 돌아오며 나는 알파세대인 아이는 완벽한 커스터마이징 세대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요즘의 커스터마이징은 유행 안에서 의미가 있다. 따라가지 않으면 뒤쳐지는 큰 트렌드가 명확히 있고, 그 안에서 허락된 만큼의 선택지를 누리는 것을 요즘의 커스터마이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커스터마이징은 남과 다른 느낌, 차별화의 쾌감을 선사하지만, 그러나 유행에서 벗어난 것은 멋진 커스터마이징이 아니다.


 커스터마이징의 시대에 매스미디어인 라디오에서 일하는 나는 역시나 직업병이 도진다. 불안과 위기감이 또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다. 레거시 미디어에 몸담은 사람은 누구나 비슷할 것이다.


 얼마 전 MBC FM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듣는데, 한 청취자가 이런 사연을 보냈다. 3대가 같이 음악캠프를 듣는다고. 배철수 아저씨는 농담 섞어 답했다. 문제 아니냐, 어느 세대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거 아니냐. 물론 청취자의 칭찬에 대한 기쁨과 고마움, 민망함을 농담 섞어 전달하려는 노련한 진행자의 말임을 안다. 그런데 우습게도, 라디오에서 일하는 사람이라서인지 순간 마음이 꾸웅 하고 시무룩해졌다. 남의 일 같지 않아서다. 이미 모든 세대를 아울러 만족시킨다는 것은 이미 이 시대에는 통용되지 않는 목표다. 디제이의 한 마디에 들어있는 수많은 고민들, 매스미디어라는 라디오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수도 없이 타진해보고 있는 제작진의 고민이 그려졌다. 


 여전히 매스미디어의 장점은 있다. 동시에 어마어마한 숫자의 대중에게 제공되는 무료의 미디어라는 점은 이용하는 자나, 수용하는 자에게 큰 전파력을 가진다. 정치, 경제, 사회 등 대규모의 시스템을 공유하는 제도적 공동체, 국가로서는 같은 정보가 차별 없이 국민에게 퍼져나가 공평하게 이것을 공유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편 '문화'의 측면에서는 지금은 대중 Mass의 의미가 매우 애매한 지점에 와 있다. 힙하고 즐거운 커스터마이징의 시대, 라디오는 어떻게 변해야 할지 오늘도 공상은 계속된다. 

작가의 이전글 아버지의 냉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