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글쓰기주제 : 거짓말
엄마는 항상 나에게 진실될 것을 당부하셨다.
어떤 상황이든 내가 참이었다면 본인은 다그치지 않고 용서해 줄 수 있다고. 그러니 거짓말은 하지 말라고. 이 세상에서 거짓말이 가장 나쁜 거라고.
처음에는 나도 엄마의 이 말을 백 퍼센트 믿지 못했다. 정말 내가 거짓말을 안 하면 다 용서해 주실까? 엄마가 가장 아끼는 옷을 망쳐놓는다거나, 아니면 엄마가 애물단지처럼 서랍에 숨겨 놓고 쓰는 빨간색 파우더 통을 망가뜨려도 과연 사실대로 말하면 용서 해 주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데, 사실 용서는 둘째치고 나에게 화를 정말 안 내실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엄마는 화가 나면 성난 코뿔소로 돌변하는 사람이었고, 그럴 때마다 엄마는 본인도 모르는 초인적인 힘이 생기는 듯했다.
한 번은 내가 학교를 가려고 현관문을 막 나서는데, 오늘 날이 추울 것 같으니 이 코트를 입고 가라며 엄마가 나를 붙잡았다. 당연히 그때의 나는 얼어 죽어도 패션을 외치던 중2병 소녀였다. 괜히 그 코트가 떡볶이 코트라서 싫다는 핑계를 대고 동복 차림으로 학교를 가 버렸다. 그런데 그 날 내가 큰 실수를 했던 게 뭐냐면, 집에 빨리 안 들어갔다는 거다. 엄마 말대로 날씨는 몹시 추웠고, 그때의 나는 집에서 기다리고 계실 엄마를 먼저 생각할 만큼 사려 깊은 아이가 아니어서, 놀 거 다 놀고 집에 들어갔는데 아니. 이게 웬걸. 현관문 너머로 성난 코뿔소 얼굴을 한 엄마가 나를 노려보고 있는게 아닌가.
그리고 성난 엄마의 한 손에 들려있던 우리집 청소기는 나의 종아리를 강타하는 사랑의 매로 둔갑 해 버렸는데,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평소에 청소기를 끄는 것도 버거워하셨던 거 같은데 참 의문이란 말이지.
다행히 내가 민첩하게 ‘잘못했어요’를 외치며 자세를 낮췄기에 망정이지. 살면서 청소기로 맞아본 건 처음이었다. 사람이 화가 많이 나면 이렇게나 무서울 수 있구나를 그때 처음 깨달았던 것 같다.
아무튼 이야기가 조금 샌 것 같지만, 다시 거짓말로 돌아와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엄마의 그 말에 의문을 품은 지 얼마 안 돼서 엄마의 그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바로 내가 엄마가 아끼는 유리컵을 깬 것이었다. 그것도 나 혼자 집에 있는 순간에.
수많은 생각들이 유리컵이 깨지는 그 찰나에 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나 죽었다. 아씨 어떡해. 성난 코뿔소. 무서워.
누군가에게 내 잘못을 떠넘길 수도 없었다. 나는 외동딸이었다. 우리집에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바퀴벌레나 혹은 가끔 날아다니는 파리들이 그 유리컵을 모르고 건드려서 컵이 깨졌다고 말하기엔, 너무 묵직한 유리컵이었다. 엄마가 믿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하자니 엄마가 너무너무 무서웠다. 나는 컵 옆에 있던 포크를 꺼내려고 했을 뿐이었는데 컵이 스르륵 떨어졌어요 라고 말하면 엄마가 정말로 나를 용서해 주실까? 엄마가 가장 아끼는 컵인데.
외출한 엄마가 집에 되돌아오시기 전에 우선 깨진 유리컵 조각부터 정리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엄마가 예전에 유리를 어떻게 치웠는지 봐 뒀다는 것이었다. 큰 덩어리들은 조심조심 손으로 집어서 신문지에 옮겨놓고, 청소기를 돌렸다. 혹시 몰라 테이프로 방바닥을 찍찍 눌러가며 모래알처럼 작은 유리 덩어리까지 치우고, 신문지에 신문지를 더해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버렸다. 쉬운 작업은 아니라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그 때마침 엄마가 오셨다.
이때부터 나의 고민은 절정에 치닫았는데. 그게 어떤 기분이었냐면, 가끔 TV 예능에서 눈 가리고 상자 안에 손을 집어 넣어서 안에 어떤 물체가 들어있는지 맞추는 게임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뭐가 들어있는지 몰라서 불안한데 물체는 만져서 정답은 맞춰야 하고, 정답을 말한 그 순간까지도 내가 말한게 맞을까 안 맞을까. 조마조마 해야하는 그 게임.
나는 무언가 액션을 취해야만 했다. 진실을 말하면 정말 용서해 주실 것인가. 아니면 진실을 말해도 화를 내실 것인가. 모르는 척 가만히 있으면 그냥 지나갈 수 있지 않을까? 혹시 나에게 물어봐도 그게 깨졌어? 나도 몰랐네 라며 천연덕스럽게 넘기면 안 혼나지 않을까? 혼나려나? 엄마의 반응을 예측할 수가 없어서 더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이런 고민도 잠시, 눈치 빠른 엄마는 신문지로 돌돌 쌓여있는 유리 덩어리들을 보자마자 내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하지만 스물스물 화가 나려고 한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셨고. 나는 쭈뼛쭈뼛거리다가 왠지 잘못했다간 엄마가 또 성난 코뿔소가 되실 수도 있을 것 같단 느낌적인 느낌에 못 이겨, 불안하지만 사실대로 말을 꺼냈다. 사실대로 말하면 다 용서해 주겠다는 엄마의 말을 믿어보기로 한 것이었다.
“어.. 사실.. 포크 꺼내려다가 갑자기 떨어졌어요. 일부로 그런 거 아니에요.. 죄송해요”
정적이 흘렀다.
엄마의 눈을 바라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떨궜다. 툭.
초가 분처럼 흐르는 시간이었고, 그 시간을 깬 엄마의 말은 놀랍도록 다정하고 침착했다.
“어디 다친 데는 없어?”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들었는데, 엄마의 눈빛에는 스물스물 서려있던 화 대신 나를 걱정하는 따뜻한 눈빛이 담겨 있었다. 심지어 내가 다친 곳은 없다고 대답하니, 깨진 유리컵을 잘 처리했다며 칭찬을 해주시는 게 아닌가!!!!!
이때의 경험은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내게는 짜릿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를 사실대로 말하기까지 수많은 고민과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인지, 그런 용기를 낸 사람에게는 엄마가 내게 그러셨던 것 처럼 나도 너그럽게 용서 해 주고 싶단 마음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예외의 상황은 있는법)
어쨌든 나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언제나 엄마에게만큼은
늘, 솔직하고 진실된 딸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