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 제작 및 텀블벅 후원을 시작하며
"광화문이었던가. 올해 4월인가 우연히 박중기 선생님을 길에서 뵙고 인사를 드렸어요. 세상에, 연세가 91세라고 하시더라고요. 당장 인터뷰부터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어요. 더 이상 늦으면 인혁당 사건 이야기를 직접 들을 기회가 없을 거 같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지난 5월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세월호 10주기 특별전'에 초청된 세월호 다큐 <침몰 10년, 제로썸>을 연출한 윤솔지 감독은 말한다. 박중기 선생님과의 어떤 우연이 마치 운명처럼 느껴졌다고. 8명의 목숨을 앗아간 인혁당 재건위 사건(2차 인혁당 사건)은 윤 감독이 가슴 뜨거웠던 스무 살 시절부터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현대사 속 의문이었다고.
"말이 안 되고 분통 터지는 일이잖아요. 독재 정권이 조작 사건을 일으켰고, 말도 안 되는 재판을 거쳐 무고한 목숨을, 그것도 사형으로 죽여 버렸다는 것이. 그때부터 쭉이었던 거 같아요. 인혁당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살아왔던 것이. 그러던 차에 박중기 선생님을 만나 뵙고, 어떻게든 영화로 만들어야겠다 싶었던 거죠."
윤 감독은 4월과 인연이 깊다. 10년째 세월호 참사 유가족과 함께하며 진상규명 운동에 천착해 왔다. <침몰 10년, 제로썸>이 그 결과물이다. 지난 2015년 서울독립영화제 등에 소개된 <열일곱 살의 버킷 리스트>도 세월호 소재 다큐다. 그에 앞서 제주4.3을 소재로 한 단편 < 3만 명을 위한 진혼>도 완성, 프랑스 파리와 독일 베를린, 캐나다 토론토에서 개최되는 영화제에 초청을 받았고, 2024 서울 4.3 영화제에 첫선을 보였다.
그리고, 1975년 4월 9일은 대한민국 사법부가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에게 사형을 집행한 날이다.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지정하기도 했다. 이렇게 유독 4월과 인연이 깊은 윤 감독은 그래서 제작사 이름을 '네번째달'이라 지었다. 그렇다면 윤 감독은 박중기 선생님과 인터뷰를 이어 나가고 있는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를 통해 무슨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걸까.
무도하게 희생된 '박정희 정권' 사법살인 피해자들
'서도원 52세, 도예종 51세, 송상진 47세, 하재완 44세, 우홍선 44세, 김용원 40세, 이수병 38세, 여정남 30세.'
1975년 4월 8일 오전 10시. 대법원에서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 관련 피고인 36명의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원심대로 형이 확정됐다. 그런데 선고 바로 다음 날인 4월 9일 새벽 4시 30분부터 아침 8시까지, 서울구치소에서 이들 8명에 대한 형이 집행됐다. 사형 집행이 시작된 것은 형량이 확정된 지 겨우 정확히 18시간 30분 만이었다. 그저 통일된 조국을 꿈꾸며 가족들과 평범한 삶을 살았던 이들의 이력은 이랬다.
고 김용원(金鏞元, 1935년 11월 10일 경남 함안군 출생, 경기여고 교사)
고 도예종(都禮鍾, 1924년 12월 25일 대구시 출생, 삼화토건 대표)
고 서도원(徐道源, 1923년 3월 28일 경남 창녕군 출생, 당시 대구매일신문 기자)
고 송상진(宋相振, 1928년 10월 30일 경북 달성군, 현 대구 동구 출생, 양봉업)
고 여정남(呂正男, 1944년 5월 7일 대구시 출생, 경북대학교 총학생회장)
고 우홍선(禹洪善, 1930년 3월 6일 경남 울주군, 현 울산 출생, 한국골든스템프사 상무)
고 이수병(李銖秉, 1937년 1월 15일 경남 의령군 출생, 삼락일어학원 강사)
고 하재완(河在完, 1932년 1월 10일 경남 창녕군 출생, 건축업)
끔찍한 사법살인이 자행된 것을 전혀 몰랐던 가족들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 조작 진상규명을 요구하던 천주교 신부 등 사회 인사들은 그날 아침 면회를 하러 서대문 교도소를 찾았다. 가족들은 남편이 정보부에 끌려갔던 1974년 4, 5월부터 사형 당일까지 단 한 번도 면회를 할 수 없었다. 1년이 다 되도록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황망한 사형 소식을 접한 가족들은 실신하고 오열했다.
소위 대법원 법관들이 판결을 한 지 불과 19시간 전후였다. 믿기지 않는 사형 집행 앞에 이들이 남긴 유언은 대략 이랬다.
"10살 막내가 보고 싶다. 통일된 조국을 염원한다." (서도원)
"가족 생계비가 걱정된다. 학교에서 지급될 것이 있으면 받도록 조치하기 바란다. 가족들을 돌보지 못해 죄송하다. 아이들아, 공부 열심히 하기를 부탁한다. 여동생도 사랑하고, 다들 이웃 간에 화목하게 지내기를 바란다." (김용원)
"가족들 얼굴을 한 번 꼭 보고 싶다. 더 할 말이 없다." (이수병)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다 이루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우홍선)
"빛을 보지 못하고 죽는 내 생애가 가련하다. 가장으로서 할 일 못하고 죽는 것이 부끄럽다." (송상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일찍 죽는 것이 억울하다. 재소 중에 소장 이하 교도관들에게 신세 많이 끼쳐 죄송하다. 담배 한 대만 피고 싶다. 물도 한 잔 마시게 해 달라." (여정남)
"하고 싶은 말이 없다." (하재완)
"조국이 하루 속히 통일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도예종)
박정희 독재정권 하에 사법 살인을 자행한 이들의 악행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도예종이 말한 '조국의 통일'을 적화통일이라고 왜곡했다. 적화라는 표현을 추가해 공문서에 기재한 것이다. 반면 사형 집행장에 참석했던 교도관들은 도예종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이후 증언했다.
독재정권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무엇을 감추려 단 19시간 만에 이들을 법의 이름으로 살해했을까.
1934년생 박중기에게 듣는다
여기, 91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무리 없이 활동을 이어가는 어른이 있다. 고문 후유증으로 한 쪽 귀가 완전히 들리지 않는 그는 먼저 간 동지들을 추모하고, 열사들을 위해 제를 올리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의 이름은 인혁당 사건 피해자 박중기다.
박 선생은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때 구속, 1년간 실형을 살았다. 10년 뒤 인혁당 재건위 사건 때도 두 달 반 극심한 고문 조사를 받다 겨우 풀려났다. 반면 동료와 선후배 8명이 황망하게 목숨을 잃었다. 1973년 '서울대 유인물 사건'이 아니었다면, 당시 6개월 정도 구속돼 있지 않았다면 그도 형장의 이슬로 희생자가 됐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가 인혁당 재건위 조작 사건에서 살아남았던 건, 사형 진행 2년 전 옥살이를 하고 있었던 알리바이 때문이었다.
그런 박 선생은 운명의 장난으로 목숨을 건졌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죄책감으로 인해 몸서리도 쳐봤지만 그 운명이 선생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유가족을 돌봤고, 피해자들을 찾았다. 또 헌신하고 투쟁했다.
"일제 강점기, 친일파 등이 청산되지 않았잖아. 미국의 영향도 여전히 받고 있는 상황이고. 그래서 이승만이 나왔고 박정희가 나온 거야. 이들을, 그 뿌리를 청산해야만 해. 그래야 현재 참사의 반복도 막을 수 있어." (박중기 선생)
윤 감독과 <인혁당 생존자, 31년생 박중기> 제작진은 지금까지 다섯 차례 넘는 인터뷰를 매번 두세 시간이 넘도록 촬영했다. 일제 강점기에서부터 하나하나 올라가면서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정작 1960년대로 올라오면 다시 또 일제 강점기 시절로 돌아가곤 한다. 즉, 실제 인혁당 당시의 이야기를 듣기까지 꽤 오래 걸리고 있다.
왜일까. 오랜만에 후배들과 이야기하는 자리가 좋으셔서일까? 인혁당 이야기가 끝나면 우리의 만남이 끝일 것 같아서일까? 아니면 인혁당 이야기를 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셔서일까?
그런 박중기 선생은 어떤 결심과 통찰이 있었기에 이러한 헌신과 투쟁의 신산한 90년 삶을 이어올 수 있었을까. 그의 선후배와 동지들, 그리고 인혁당 유가족들이 바라보는 인간 박중기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또 반복되는 국가폭력과 사회적 타살을 막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인혁당 생존자, 31년생 박중기>는 박중기 선생은 물론 수많은 인터뷰이를 만나며 질문하고자 한다. 또 그 답을 찾고자 한다. 인혁당 사건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장편 다큐로는 최초다. 그리고, 반년도 채 남지 않은 2025년은 인혁당 사건 50주기다.
덧붙이는 글 |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 텀블벅 후원 페이지입니다. https://tumblbug.com/19750409 글을 쓴 하성태 기자는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 작가 및 프로듀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