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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성태의 시네마틱 Aug 27. 2024

"고물팔아 동지가족들 돌보고... 그래도 미안하다셔요"

[인터뷰] 박중기 선생 보필해 온 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


▲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 인터뷰 촬영 중인 이창훈 4.3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 ⓒ 네번째달


"요즘 정권을 특정해서 얘기해도 될는지 모르겠는데, 지금 우리 사회 여러 문제들 중에서 대통령이 자기 가족 혹은 주변을 지키기 위해서 법을 이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검찰 정권이라는 말들을 쓰잖아요. 과거에는 자기 정권, 집권 야욕,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정보기관, 심지어 군대까지 이용했던 것처럼 지금도 그러고 있다고 보는 거죠."


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의 진단이다. 이 실장은 검찰정권이라 일컬어지는 윤석열 정부가 친일 및 반북 기조를 강화하는 정국 속에서 1, 2차에 걸친 '인혁당 사건'이 가리키는 현재적 의미를 위와 같이 평가했다. 인혁당 사건이 과거 박정희 정권이 집권 야욕에 국민들을 속이기 위해 조작하고 일으킨 여러 사건들 중 하나라는 부연과 함께.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 촬영을 위해 지난 8월 초 만난 이창훈 실장은 인혁당 사건의 배경을 설명하면서도 계속해서 "과거에만 매몰되지 말 것"을 당부하며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었다. 그는 1980년대 말 민주화 운동 이후 인혁당 사건 희생자인 고 이수병 선생 추모제에 경희대 동문으로 참가하며 맺어진 인혁당 사건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박중기 선생과의 인연도 물경 30년이 넘는다. 이창훈 실장은 1990년대 들어 설립된 이수병 선생 기념사업회에 상근직으로 재직하며 처음 박 선생을 만났다 .이후 1990년 대 말, 천주교인권위원회를 비롯해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등 여러 시민사회 단체들이 함께 만든 인혁당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 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에도 참여했다.


경희대 동문인 이수병 선생과의 인연이 결국 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 일까지 이어진 셈이다. 박중기 선생이 이사를 맡고 있는 4.9통일평화재단은 인혁당 사건 재심 이후 인혁당 재건위 사건 사형수 8인의 유족들이 국가 배상금으로 재단설립기금을 출연해 2008년 창립됐다. 그런 이 실장이 20년 가까이 지척에서 바라본 '인혁당 사건 생존자' 박중기 선생은 어떤 어른이었을까.


"죄책감이라는 표현은 본인이 그리 말할 수는 있을지 몰라요. 비겁하게 나만 살아남았다, 라고 본인은 생각할는지 모르고요. 하지만 죄책감이라기보다 가족 같은 느낌이 들었겠죠. (희생자) 가족들을 돌봐주는 일들을, 재정적으로 돌봐주는 그런 일들을 많이 하셨다고 해요.


일단 돌아가신 동지들 유언도 있고, 다 자기 가족에 대한 걱정이 있었을 테고요. 선생님도 이들 가족이, 자기 가족 같은, 자기 자식 같은 느낌들이 들었겠죠. 선생님은 2차 인혁당 사건 이후 고물을 모아서 파는 일을 하셨다고 해요. 그렇게 번 돈으로 동지들 가족들을 돌봐주는 일을 하신 거죠. 제가 만나는 고 이수병 선생님이나 고 김용원 선생님 가족분들은 그런 얘기를 해요. 아버지 같은 분이시라고. 그래서 명절 때도 찾아뵙는다고요."


박중기 선생이 인혁당 이야기를 선뜻 꺼내지 못 하는 이유


▲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 인터뷰 촬영 중인 박중기 선생. ⓒ 네번째달


박중기 선생은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 제작진과 두 달 가까이 인터뷰를 진행하는 가운데에서도 직접 인혁당과 관련된 얘기를 선뜻 꺼내지 못 하고 있다. 꼭 그렇게 느껴진다. 자꾸만 자신의 청년시절로, 일제 시대와 해방 이후로, 4.19와 그 이후 사정을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이곤 한다. 왜 일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저도 잘 모르겠다"면서도 유려하게 배경을 유추해 내는 이창훈 실장에게 대신 물었다.


"(인혁당 사건 관련) 선생님들은 어쨌든 해방을 눈으로 봤잖아요. 박중기 선생님 같은 경우는 김원봉 장군이 귀환했을 때 (고향인) 밀양 군민들이 나와서 환영하는 그 엄청난 광경을 보고 자라셨거든요. 그래서 해방이라는 뜨거운 그 기쁨, 이제 드디어 일제가 물러가고 국민들이, 이 땅에서 살고있는 사람들이 정말 주인이 되는 나라가 만들어 지겠구나 이런 걸 기대했던 거죠.


하지만 아시는 대로 독재자들이 등장하면서 주인이 되어야 할 국민들이 다시 노예가 되는 상황을 직면했던 거죠. 그래서 그런 세상을 좀 바꿔 봐야겠다는 꿈들을 가지셨고요. 그런데 인혁당 사건으로 8명이 사형 당한 아픈 기억만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좀 가지고 계신 것 같아요."


궁금증이 조금은 풀렸다. 인혁당 사건에 대한 어떤 회한, 또 그 시절 배경을 손자뻘인 제작진이 제대로 알았으면 하는 우려와 기대가 뒤섞인 일종의 노파심이었으리라. 박 실장은 또 이렇게 부연했다.


"선생님들이 외치는 것 중 반미 이야기들이 있거든요. 미국이 우리한테 도움만 된 게 아니라 과거 해방 시기 이승만을 지원했고, 박정희를 지원했고, 그다음 5.18 때도 신군부의 무자비함을 눈감아준 미국의 모습을 제대로 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셔요. 지금도 보면 미국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 일하지 우리 대한민국 이익을 위에서 일하지는 않잖아요?


지금은 경제적인 이유가 크지만 과거 실제로 자기 옆에 있는 동료가 죽고 나라가 무너지는 그런 걸 직접 봤기 때문에, 선생님들은 지금 우리가 보는 것보다 더 큰 생각들을 갖고 계신 것 같아요. 그래서 본인들이 살아왔던 그 경험들을 이야기해야만 인혁당 사건을 통해서 돌아가신 여덞 분의 진실을 알 수 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오랜 시간 인혁당 사건에 천착해 온 이 실장의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박중기 선생님은 그래서 실제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창훈 실장 또한 집필했었던 잘 정리된 책들로 이해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닐까. 그래서 본인은 앞서 숱하게 내뱉었던 신문 기사 속 인터뷰와 달리 앞으로 남은 인터뷰 촬영 기간 더 깊은 속내를 드러내고 싶으신 건 아닐는지. 이 실장의 설명을 들으니 무언가 숙연한 감정마저 들었다.


"사건의 진상은 규명이 돼 있잖아요. 그 사람들이 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형 때까지 무수한 고문과 또 고문뿐만이 아니라 자기가 사건을 겪음으로 인해 가족까지 피해를 당할 수 있다는 생각들을 못한 게 아닐 텐데, 왜 그 길을 가려고 했을까 하는 배경 설명을 중심으로 이야기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전태일 열사에 대한 부끄러움, 그에 못지 않았던 청년 시절


▲  과거 시민사회단체 활동 중인 박중기 선생. ⓒ 4.9통일평화재단


"전태일의 이야기 중에 '나에게 대학생 친구만 하나 있었더라면 내가 근로기준법이 어떤 것인지 알았을 텐데' 하는 대목이 있지 않습니까? 선생님들이 그런 생각을 했을 거 같아요. 전태일이 스무살이었잖아요. 저 어린 노동자마저 분신하는 모습을 보면서 4.19까지 경험했던 우리들이 가만히 있어도 되겠느냐 하는."


1차 인혁당 사건이 196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1974년에 발생했다. 1차 사건으로 1년간 옥고를 치른 박중기 선생은 이후 맏형 격으로 활동했고 서울에서 동료들과 후배들을 돌봤다. 정확히 그 중간쯤 되는 시기, 전태일 열사의 사망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드리웠다. 박중기 선생을 비롯해 고작 30~40대였던 선생들도 마찬가지였을 터.


이를 전후한 박중기 선생의 구체적인 활동은 어떤 양상이었을까. 이 실장의 설명에 따르면, 5.16 쿠데타 이후 박중기 선생은 도망자 신세가 됐다. 앞서 4.19 당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전국위 청년부장을 맡았다. 그에 앞서 부산지역 진보 청년운동단체 민족민주청년동맹(민민청) 서울맹부에서 투쟁국장을 맡았다.


이승만 정권에서도 편치 않은 삶이었건만 4.19와 5.16 이후에도 한국 사회 변혁 운동에 투신하며 정권의 눈엣가시 같은 활동을 이어갔다. 박중기 선생은 고3이던 1954년 부산에서 지금은 고인이 된 김금수 선생을 통해 만난 인혁당 희생자 이수병 선생 등과 만든 사회과학독서동아리 '암장'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래 청년 시절을 온통 한국사회의 변화와 변혁에 몸 바친 셈이다.


"군사 쿠데타 이후 2년 정도 지나면 박정희가 민간인들한테 정부를 이양한다면서 정치 활동이 금지됐던 사람들을 풀어주는 과정이 있었어요. 선생님도 그때 사회에 복귀하셨죠. 아마 제 생각이고, 선생님도 종종 얘기를 하시곤 했는데요. 군사 쿠데타로 세워진 박정희 정권이 불의하다고 보시고, 4.19와 같은 과정을 통해 이 불의한 정권을 몰아내고 새로운 민주정부를 세워야겠다는 뜻을 가지셨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향후 2차 인혁당 사건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분들과도 '학생들은 이렇게 들고 일어나고 있고 이들을 정부가 최루탄이며 곤봉과 군홧발로 짓밟는 상황을 어떻게 타개했으면 좋겠느냐'는 과정을 거치셨던 거죠. 그러다 중앙정보부가 개입돼서 고문을 가하고 조작을 거친 조작 사건이 1차 인혁당 사건이고요."


박중기 선생은 그로 인해 1년 형을 받았다. 재판 과정만 1년이 넘었다. 대법원 판결이 나서 바로 석방이 됐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은 불가능했다. 빨갱이란 낙인이 찍혔기 때문이다. 수감 생활 전 거쳤던 기자 일도 그만둬야 했다. 결혼도 했고 자식들도 생겼기에 경제 생활은 필수였다. 잠시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동지들과 신촌에서 목재상도 경영했다. 그러다 전태일 사건을 맞닥뜨렸다.


박중기 선생과 같은 생각을 지닌 이들이 적지 않았다. 당시 대학생들도 세력을 형성했고, 소위 말하는 민청학련 사건에 주축으로 가담했던 이들이 그들이었다. 그 과정에서 박중기 선생과 동지들도 어떻게든 연루가 될 수밖에 없었다.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정권을 전복하고자 하는 과격 시위로 만들고 인혁당 가담자들을 배후로 몰았던 것처럼,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박중기 선생을 비롯한 여럿이 지목됐다. 말 그대로 운명의 장난이었다.


"그래서 다시 감옥에 가셨어요. 당시 서울대 유인물 사건이 터져요. 그 때문에 6개월 가량 옥살이를 하시게 됩니다. 2차 인혁당 사건을 조작했던 무리들은 본인들이 조작하려는 간첩 사건의 일정에 박 선생님이 감옥에 가 있었으니 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거였죠."


"미안하다, 후배들아"


▲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 인터뷰 촬영 중인 이창훈 4.3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 ⓒ 네번째달


박중기 선생의 별명 중 하나가 능참봉이다. 저 옛날 왕릉을 지키던 벼슬자리가 바로 능참봉이다. 동지들을 사형장의 이슬로 떠나 보낸 뒤 '살아남은 자'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 이사장 등의 활동을 한 이력 때문이리라.


"박 선생님은 민주화 이후 동지들이 청와대에도 들어가고 사회적인 변화가 일어나면서 해외를 처음 나갈 수 있었다고 해요. 중국에 한 번 다녀오시고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시면서 '사회가 바뀌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이후에야 단체 일들을 맡으실 수 있었죠.


그래서 처음 맡으신 게 경희대 이수병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자문위원을, 경희총민주동문회 고문 이런 걸 맡으셨고요. 통일단체들 후원도 하시고, 백낙청 선생님과 친분이 있으셔서 창작과 비평이 어려울 때 많이 도와주셨다고 해요.


또 이수병 선생님처럼 민족민주 운동을 하시다가 돌아가신 분들을 모시는 단체가 있어요.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라고. 거기서 이사장을 하셨죠. 선생님이 고급스러운 우스갯소리를 많이 하셔요. 능참봉이란 표현은 그러니까 '사회민주화운동을 하시다가 돌아가신 분들은 왕 대접을 받는다'. 본인도 높이지만 열사분들을 높이는 우스갯소리를 하신 거죠."


거의 환갑이 될 때까지 말술을 즐겨 하시고, 독주도 마다치 않았다는 박중기 선생. 창립부터 몸담았던 거시기 산악회에서도 총무를 보며 살뜰히 동지들을 챙겼다는 선생을 30년 넘게 모셔온 이창훈 실장은 "앞장서기보다 뒤에서 후배들을 견인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자처하는 모습"이, 몸소 겪어 온 일화를 후배들에게 진심으로 전해주는 모습 역시 "감동적"이라고 표현했다.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사서 전국 여러 단체에 보내주는 일도 그 일환일 터.


그렇다면 개인적으로 이창훈 실장이 가져온 '인간 박중기', '어른 박중기'에 대한 느낌은 무엇이었을까. 이 실장은 "아주 심지가 굳으신 분"이라며 이렇게 부연했다. 박중기 선생과 인혁당 사건에 관한 다큐를 제작해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일단 사람이 느끼는 부분을 표현을 할 때, 또 사람이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저게 진심이다 아니다를 느끼잖아요. 선생님은 1년에 한 번씩 같은 얘기를 하셔도 몸과 삶에 아주 배어있지 않으면 못 하는 표현들을 하세요. 또 사람이 한 얘기를 몇 년 후에 까먹을 수 있지만, 선생님은 몇 년이 지나도 일관된 얘기들을 하세요.


그 내용은, 다름 아니라 '우리나라가 외세에 짓밟혀서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지 못하다 보니 지금까지 독재자 같은 대통령을 뽑아서 살고 있다'. 두 번째는 '자기가 젊었을 때 그 독재자들하고 제대로 싸워서 후배들 시대에는 독재자 같은 사람들이 안 나오게끔 했어야 하는데 자기가 잘못한 것 같다, 미안하다'. 마지막으로, '동지들이 나 대신 죽었다'. 그 미안함으로 한평생 살아온 이야기들은 변함없이 30년 동안 제가 듣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덧붙이는 글 | https://tumblbug.com/19750409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 텀블벅 후원 페이지입니다. 글을 쓴 하성태 기자는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 작가 및 프로듀서입니다. 연재 기사는 다큐멘터리 구성안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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