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가 지금 굉장히 심각하다. 적자가 1400억 정도 예상된다. 그 돈을 메우는 방법은 경영진이 열심히 하는 게 아니다. '인건비 줄이겠다'. 그래서 명예퇴직자를 막 받는다. 올 초에 저와 절친인 정세진 아나운서 등 80여 명이 나갔다. 이번에 (명퇴자를) 또 받았다. 아무튼 최욱이랑 엮이면 다 (KBS를) 나간다. 저와 <더 라이브>했던 이광용 아나운서. 이 형은 KBS를 진짜 어마어마하게 사랑하는 형이다. 기분이 좀 그렇더라. KBS를 계속 쪼그라뜨리고 있다."
지난 27일 방송된 유튜브 방송 <매불쇼> 진행자 최욱의 개탄이다. 최욱은 지난해 11월 KBS 박민 사장 취임 첫날 진행하던 <더 라이브>가 폐지되자 "진행자도 몰랐던 사실"이라며 "가짜뉴스일 것"이라며 황망함을 드러낸 바 있다. 최욱의 개탄처럼, 앞서거니 뒤서거니 KBS의 얼굴로 활약하던 아나운서들과 진행자들이 속속 명예퇴직으로 물러나거나 자의 반 타의 반 회사를 그만두고 있다.
KBS라디오 <FM 대행진> 황정민 아나운서와 <더 라이브> 이광용 아나운서가 대표적이다. 앞서 KBS는 지난 20일부터 2차 희망퇴직과 특별명예퇴직 신청을 받고 있다. 그 인원은 30여 명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1차 퇴직자는 87명이었다. KBS는 올해 KBS 적자 규모가 1431억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작년보다 수신료 수입이 2600억 원 가량 급감한 결과다.
KBS는 이와 같은 재정난 타개책으로 인건비 1100억을 줄이겠다는 해법을 내놨다. 스타급 아나운서들의 퇴직이 줄을 잇는 배경이다. KBS는 또 오는 9월 일반직 직원을 대상으로 한 2개월 무급휴직 신청도 받는다. 창사 이래 첫 무급휴직이다.
내부반발은 당연한 수순이다. 이와 관련, 지난 2023년 8월에 설립된 같이(가치) 노조는 지난 21일 성명을 내고 "박민 사장과 현재 경영진이 꺼낼 수 있는 카드는 결국 인적 구조조정이 전부인가"라며 "대규모 적자에 인건비라도 절감할 상황이면 경영진이 급여를 모두 반납하십시오. 현재 회사에서 '가성비'가 가장 떨어지는 건 경영진"이라고 박민 사장과 임원진을 직격했다.
전국언론노조 KBS본부도 26일 "수신료 분리고지 부실 대응과 각종 편파 방송으로 촉발된 광고 수입 부진으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현 KBS의 위기를 구성원들에게 떠넘기려는 파렴치한 행위를 중단하라"며 "공영방송의 경영위기에 대해 책임져야 할 사람은 지금 이 순간에도 현장에서 땀 흘리며 일하고 있는 구성원들이 아니라, 공영방송의 위기를 자초한 당신들(낙하산 사장과 그 일당)"이라고 지적했다.
박민의 KBS가 자처한 심각한 상황
▲ 박민 한국방송공사 사장(KBS)이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과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지난 15일 광복절에 일본 기미가요가 나오는 오페라 <나비부인>과 이승만 다큐 <기적의 시작> 편성이 적절했는지 묻는 야당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유성호
윤석열 정부는 KBS 수신료 분리징수를 밀어붙였다. 작년 7월, 윤 대통령은 TV 수신료를 전기요금과 함께 고지·징수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을 재가했다. 전문가들은 KBS 장악의 전초전이라 평가했다.
이와 관련, 지난 5월 헌법재판소는 KBS와 EBS의 'TV 수신료 분리징수 시행령'이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KBS가 작년 7월 해당 시행령이 헌법상 '방송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내용 등이 담긴 헌법소원을 청구한 데 따른 합헌 결정이었다.
한전 등이 얽힌 수신료 고지‧징수를 둘러싼 혼선은 일찍이 예상됐다, KBS 재원의 48%에 달한다는 수신료 수익의 저하나 혼란상도 이미 예고된 바였다. 반면 박민 사장 취임 이후 KBS가 수신료 분리징수와 관련해 내놔야 할 실질적인 대응책은 감감무소식이다.
"이쯤 되면 합리적 의심이 생긴다. 시청률 떨어지고, 호감도 떨어지고, 재정적으로 수신료가 중요한 KBS 재원 구조 약해지고, 결국 상업 광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기업에 팔릴 이유가 자연스럽게 생긴다. KBS를 민영화하려는 걸까?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구조조정을 하고. 합리적 의심이 생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가 공영방송을 민영화하고 싶겠나."
조국혁신당 이혜민 의원이 제기한 의문이다. 지난 28일 이 의원은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결산보고에 출석한 박민 사장을 향해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며 KBS의 난맥상을 나열한 뒤 "자진사퇴하실 의사가 있느냐"며 위와 같은 의문을 제기했다. 또 이 의원은 지난 광복절 전후 논란을 자처한 <나비부인> 방영 이후 온라인을 중심으로 번지고 있는 KBS 수신료 거부 운동도 소개하기도 했다.
이날 김현 더불어민주당 의원 또한 "KBS 사장은 안정적으로 경영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며 "분리징수 시행령이 계류 중일 때 노력했는가"라고 따져 물었다. 수신료 분리징수를 막기 위한 별다른 노력을 기울인 것 같지 않은 박민 사장 체제 KBS가 보여준 그간의 무능을 지적한 것이다.
결국 멘털리티, 즉 정신자세와 사고방식의 문제다. KBS의 재정 악화는 윤석열 정부가 밀어붙인 수신료 분리징수가 불러온 예고된 결과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박민 사장이 가시적으로 꺼내 든 카드가 인원 감축인 셈이다.
예고됐던 사태들, 무능한 KBS
▲ 기자회견 90여개 시민사회언론단체들로 구성한 언론장악저지공동행동이 16일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KBS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KBS 박민 사장 사퇴를 촉구했다. ⓒ 언론노조
박민 사장이 국회에 출석한 28일, 전국언론노조 KBS본부는 'KBS 장악 대외비' 문건 전체를 공개했다. 앞서 지난 3월 MBC <스트레이트>는 해당 'KBS 장악 대외비' 문건을 보도했고, 직후 KBS본부는 기자회견을 열어 "낙하산 박민 사장이 취임을 즈음해 작성된 'KBS 장악' 시나리오가 드러났다"며 "노동법 및 방송법 위반 등 심각한 내용이 담겨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해당 문건 및 KBS본부에 따르면, 문건에 제시된 수치대로 박민 사장 취임 후 KBS 임원들은 20% 국장과 부장들은 15%씩 임금을 삭감했다. 잇따른 퇴직과 창사 최초 무급휴직 사태를 떠올린다면 "현재 '가성비'가 가장 떨어지는 건 경영진"이라는 KBS 같이 노조의 지적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KBS본부는 사측의 외주제작 활성화도 지적했다. 내부인력 감축 및 인건비 절감을 위한 방편이라는 것. 단적인 사례로 기술본부의 후반제작 역량 무시나 PD 시사부문의 보도본부 이관을 들었다.
KBS본부는 "특히 광복절 방송 참사의 하나였던 <기적의 시작>이 어떻게 구매돼서 방영했는지를 살펴 보면 외주제작 활성화의 위험이 드러난다"며 "낙하산 박민 체제에서 우파 간부들을 기용했듯이 우익 성향의 프로그램을 구매해 방영하는 형식으로 KBS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훼손할 우려가 크다"고 꼬집었다.
무엇보다, "우파 중심 등용"을 기조로 한 문건은 '신임 사장 2024년 개혁과제' 중 첫 번째로 '정원 축소 및 인력감축 선언'을 제시하며 "정원 5404명→4200명으로 대폭 축소 후, 연차적으로 축소하여 3600명(?) 이하 수준으로 정원을 축소할 것임을 선언함"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한편 KBS는 관련 문건을 '괴문서'로 규정, 공공성·신뢰성에 심각한 침해가 발생했다며 MBC와 '스트레이트' 제작진을 상대로 법원에 정정보도와 1억 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박민 사장이 보인 격한 반응
일제를 찬양하거나 미화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이 오페라는 일본에 주둔한 미국인 장교의 현지처가 된 게이샤가 자식을 빼앗기고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내용인데, 이런 내용의 오페라를 방영한 것이 일제를 찬양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지난 27일 KBS가 시청자 청원 게시판에 올린 사과문 중 일부다. 제79주년 광복절인 지난 8월 15일 오페라 <나비부인>을 방송한 것에 대해 "일본 기미가요 선율이 일부 배경음악으로 사용된 푸치니의 오페라를 방송함으로써 시청자 여러분께 불편함과 걱정을 끼친 점에 다시 한번 사과드린다"고 적었다.
28일 국회에 출석한 박민 사장은 위와 같은 논리를 정확히 반복했다. 사과 내용도 대동소이했다. 그러면서 박 사장은 "적어도 친일 방송은 아니라고 본다"는 주장을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박 사장은 "<나비부인>이라는 작품이 일본을 정말 찬양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내용을 담고 있고 군국주의를 찬양한다든지 했다면 (제가) 사퇴를 해도 모자라다. 그걸 틀어서 친일하겠다고 하면 미친놈"이라며 격한 발언까지 쏟아냈다. 적반하장이란 반응이 적잖다.
▲ "KBS를 극우친일방송, 땡윤방송으로 만드는 박민 즉각 사퇴 촉구" 언론장악저지공동행동 주최로 16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KBS 본관 앞에서 열린 'KBS를 극우친일방송, 땡윤방송으로 만드는 박민은 즉각 사퇴하라!' 긴급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박민 사장의 사퇴"와 "공영방송 장악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 이정민
<나비부인>의 일본 찬양 여부가 관건이 아니다. 우리 국민들이 광복절에 가문이 몰락한 일본 게이샤 출신 여성의 질곡의 삶과 미국 장교와 사랑을 그린 일본풍 작품을 봐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나비부인>의 친일 여부가 문제가 아니라 그런 편성이 가능하게 된 KBS 사측 및 임원들의 내부 분위기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이조차 파악하지 못한 듯한 박민 사장은 편성과 관련해 본인 책임을 묻는 의원 질의에 "편성본부장이 한 것"이라며 "저는 편성할 권한이 없다"고 답했다. <나비부인> 및 이승만 미화 다큐 <기적의 시작>을 편성한 KBS 편성본부장은 이날 사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 전형적인 꼬리 자르기가 아니냐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이 모두 박민의 KBS가 자처한 일이다. 이미 예견됐던 수신료 분리징수를 둘러싼 혼란도, 이로 인한 막대한 수익 감소와 그로 인한 인원 감축 사태도, 광복절 논란까지 모두 박민 사장 취임 이후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KBS의 예견된 사고라 볼 수 있다.
반면 박민 사장의 KBS가 보여주는 대응은 안일함과 무능, 일시적인 면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과연 박민 사장은 국민의 신뢰나 시청률을 잃는 것은 둘째치고 정상화가 불가능한 지경으로 빠져들고 있는 공영방송 KBS를 회복시킬 의지가 있기는 한 걸까. 박민 사장이 보여준 그간의 행보만 놓고 보면 이혜민 의원이 "KBS 민영화"를 의심한 것도 과장은 아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