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안내센터입니다.”
평소보다 높은 톤으로 건넨 인사가 무색하게 따르는 말이 없다. 수화기 너머의 누군가는 간간히 작은 숨소리만 내뱉을 뿐 한동안 침묵을 지킨다. 전화가 끊어진 걸까? 컴퓨터 화면에 띄워진 ‘상담종료’버튼을 눌러야 하나 망설이던 차에 연륜이 묻어나는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어...제가 그 관광지에 좀 가고 싶은데요. 어떻게 해야 할지...”
종종 어르신들에게 이런 문의가 결려오곤 했다. 내가 일하던 관광지의 안내센터에는 하루에 수백, 수천통의 전화가 걸려왔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어떤 답변을 해야 할지는 이미 정해져있었다. 저희는 온라인으로만 예약을 받기 때문에 홈페이지에서 회원가입 먼저 진행하신 후 어쩌구 저쩌구...
하지만 그날은 선뜻 형식적인 매뉴얼을 안내하기가 어려웠다.
어르신들에게 온라인 예약이란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혼자 해결해보려는 분들에겐 끈기 있게 수화기를 붙들고 버튼 누르는 법을 하나하나 설명하기도 했고, 포기가 쉬운 어르신들에겐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안내하기도 했다.
이번 어르신은 어느 쪽일까, 전화로 예약 안 해준다고 호통만 치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손으로는 바쁘게 상담내용을 기록하면서 마이크가 달린 헤드셋에 귀를 기울였다. 할아버지는 가입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다. 아, 그 쪽이시구나.
나는 최대한 친절하고 부드러운 어투로 회원가입 방법을 설명한다. 답답해서 미치겠다는 느낌이 들지 않게, 행여 귀찮아한다는 기색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게 내가 상담원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친절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고객님, 오른쪽 상단에 있는 회원가입 버튼 보이시나요? 잘 안보이세요? 오른쪽 상단이요. 아니, 거기 말고 오른쪽 상단입니다.”
한참을 헤매던 할아버지가 마침내 ‘덜컥’하고 묵직하게 마우스 클릭하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까지 들려온다. 우리는 장장 이십 여분에 걸쳐 회원가입을 마친 후에야 대망의 입장권 예매하기 순서로 넘어갈 수 있었다. 회원가입에 성공한 할아버지는 신이나신 모양인지 격양된 목소리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으신다.
“사실 재작년부터 거길 꼭 가보고 싶었거든요. 티비에서 봤는데 참 예쁘고 좋더라고요. 언제 한번 가야지, 가야지 하다 이제야 가게 되네요. 허허.”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귓가에서 춤을 춘다. 참 봄바람 같은 목소리다.
상담일을 하다보면 종종 이런 일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컴플레인에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가도 관광지에 방문할 생각에 들뜬 목소리나 친절하게 상담해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목소리를 들으면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로 인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일 말이다. 그날도 나는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그만 따라 웃고 말았다. 그러나 원활이 진행될 것만 같던 입장권 예매의 복병은 다른 곳에 숨어있었다.
“이거 결제가 안 되는데... 어떻게 된 거죠?”
할아버지의 컴퓨터 화면은 십여분째 결제페이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신용카드 결제로 넘어가면 지속적으로 오류가 발생했고, 휴대폰 소액결제는 설명만으로도 아득해 하셨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가상계좌 결제에서 헤매다보니 입장권이 그만 동이 나버린 것이다.
“고객님, 죄송하지만 원하시는 일자의 입장권은 전부 소진되었습니다. 아쉽지만 다른 일자로 시도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수화기 너머에선 멋쩍은 웃음만 들려왔다.
“시간은 되는데... 저는 결제를 못할 것 같네요.”
결제페이지에서 수차례 실패를 겪은 할아버지는 잔뜩 위축된 목소리로 답했다. 하는 수 없이 주변 지인들에게라도 부탁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지만 이내 부탁할 주변인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것 참, 한참을 애써주셨는데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저 같은 사람은 영영 그곳엔 가보지 못할 것 같네요. 세상이 참 많이 변했군요.”
정중한 인사와 함께 통화가 종료되었다. 나는 전화가 끊긴 후에도 한동안 상담종료 버튼을 누르지 못한 채 앉아있었다. 마음 같아선 내가 직접 입장권을 결제해 할아버지께 양도해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상담원이 선을 넘어 특정 고객에게 과도한 서비스를, 그것도 개인정보 유출이 우려되는 행동을 저지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할아버지의 멋쩍은 웃음소리와, 위축된 목소리가 한숨처럼 내뱉던 “저 같은 사람은 영영 가보지 못할 것 같네요.” 하던 말이 하루 종일 가슴을 먹먹하게 짓눌렀다. 얼굴도 모르는 낯선 노인의 상심에 눈시울이 붉어지는 연유는 무얼까. 나는 공연히 목을 한번 가다듬고 상담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와 동시에 상담목록엔 ‘통화시간 48분’이라는 부질없는 숫자만 깜빡거렸다.
기껏해야 나는 이곳에서 성수기에 반짝 일하는 단기알바 상담원에 불과했다. 엄청난 책임감과 사명을 갖고 일한 것도 아니었고, 고작 몇 개월 일한 걸로 ‘최고의 서비스 사원’ 상을 수상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때의 일은 내 속에 깊게 남아 기어이 얼룩을 새겼다. 나는 이따금씩 그때 일이 떠오를 때면 얼굴도 모르는 노인이 어떻게 내게 와 이토록 짙은 얼룩을 남겼는가에 대해 고민하곤 하였다.
어떤 고민은 순식간에 뇌리를 스치듯 “유레카!”를 외치기도 하고, 또 어떤 고민은 영혼 속을 유영하다 나도 모르는 새에 해답을 가져오기도 한다. 그날의 일은 줄곧 내 머릿속을 맴돌다 어느 날 돌연 “잘 지냈어?” 인사를 건네며 넌지시 답을 보내왔다.
할아버지는 내가 생각하던 이상적인 어른이었던 것 같다. 비록 홈페이지 회원가입을 하는데 이십여분이 걸리고, 온라인 결제에는 영 젬병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결제 페이지를 왜 이따위로 만들었는지 화내지 않고, 온라인 예약만 받으면 우리 같은 노인들은 관광지에 오지 말라는 거냐며 애먼 이에게 세상에 대한 분풀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변해버린 세상을 인정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내게 큰 감명으로 다가왔다.
나이를 먹으면 지나온 세월만큼의 어른이 된다고 생각했는데, 살면서 진정으로 존경하고 따를 수 있는 어른을 만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걸 우리는 그동안 만난 수많은 어른아이들을 통해 깨닫는다. 내가 살아온 시간, 경험, 내게 그려진 나이테가 정답이라는 신념으로 일관하다 타인과의 소통이 불가능해진. 자신이 지닌 나이테만큼의 자존심으로 존경받길 바라면서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수많은 열등감 덩어리들을. 그리고 그들을 보며 남몰래 지었던 낙망의 얼굴을...
나는 할아버지를 만나 안도했었나보다.
만일 누군가 내게 자라나는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느냐 묻는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아이에게 훈수를 두는 것만큼 사공이 많은 배가 또 있을까? 하지만 꼭 한마디를 전해야 한다면 나는 그때의 할아버지가 되어 말하고 싶다.
“나는 인터넷 홈페이지에 회원가입을 하는 데는 한참이 걸리고, 온라인 결제는 하는 법도 모르는 노인이지만 한마디만 할 테니 들어보렴. 너는 너 자신을 지키며 타인과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거라.
타인을 과하게 무시하면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될 수 있고, 필요이상으로 의식하면 스스로를 잃어버릴 수 있으니까. 너는 단단한 마음으로 너 자신을 지키되 눈은 늘 타인을 보고, 하늘을 보고, 꽃을 보는 사람이 되길 바라. 그러면 나중에 손꼽아 기다리던 관광지에 갈 수 없게 되도 낙담하지 않고 멋쩍게 웃어넘길 수 있는 노인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살면서 어른에게 이런 말을 듣길 간절히 바래왔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