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가는 건 지옥이었다. 내게 있어 학교에 대한 첫 기억은 여덟 살, 초등학교 입학식 날 코피를 흘리며 담임선생님 품에 안겨 있던 순간이다.
“이 아이 부모님 어디 계신가요? 너 이름이 뭐라고 했지?”
운동장을 활보하며 보호자를 찾던 선생님이 이름을 물어도 나는 코피를 줄줄 흘리며 답을 하지 못했다.
당시 나는 불안하면 코가 휘어지도록 움켜쥐거나 무릎에 내려앉은 딱쟁이를 뜯어 기어이 피를 보는 버릇이 있었다. 엄마 아빠는 아직 네가 어려서 그런 거라고, 학교에 들어가서 친구들도 사귀고 공부도 배우면 다 나아질 거라고 했다. 그러나 초등학교에 입학해 고학년이 되어서도 나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발표를 시키면 얼굴을 붉히며 울어버리는 아이, 현장학습이라도 나가면 낯선 환경이 불안해 십분이 멀다 하고 화장실에 들락거리는 아이가 바로 나였다. 이런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은 학창 시절 내내 이어져 마침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에는 ‘이대로 남들에게 섞여 흘러가는 대로 살다가 죽어야지.’ 하고 생각하는 열아홉 살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생각이 바뀌게 된 건 5년 후, 낯선 일본 땅의 벽화 앞에서였다.
대학교 3학년을 마친 나는 식견을 넓히겠다는 핑계로 무작정 일본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전공을 살려 경험을 쌓고 싶다는 건 번지르르한 핑계일 뿐, 실은 취업을 피해 도망친 것이나 다름없다.
4학년이 되면 진로를 정하고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하는데 아무리 고민해도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전혀 알지 못했다. 흘러가는 대로 살다가 죽겠다는 생각으로 지내왔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그래, 이대로 4학년이 되어 어영부영 취업전선에 뛰어들 수는 없다. 나는 뭐라도 찾아야 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나는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부모님께 휴학계를 내고 일본에 가거나 여의치 않으면 한국에서 이런저런 자격증을 따겠다고 말했다. 어느 쪽이든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휴학계 허락만 받으면 어떤 걸 할지는 천천히 고민해 보면 될 문제였다. 그런데 마침 사주를 철썩 같이 믿던 아버지가 철학관에서 “둘째 딸은 해외에 나가면 성공하겠네. 당장 내보내!”라는 말을 들어왔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더 이상 고민할 필요 없이 일본행 비행기에 오르게 되었다.
언젠가 해외에 나가 살아보고 싶다고 막연히 꿈꿨던 적은 있었다. 그러나 막상 눈앞에 닥친 일본유학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아온 내게 인생 최대의 도전이 되었다. 한국에서 비자를 신청하고 부동산을 알아보며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 채 지내다 보니 어느새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 서 있었다.
출국하기 전 어머니는 조금이라도 버티기 힘들면 바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고, 빠져나갈 밑밥이라도 깔아놓는 양 나도 그러겠다고 대답했지만 실은 알았다. 이제와 돌아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지금까지 뭐 하나 제대로 해본 적 없고, 그나마 말이라도 알아듣는 일본으로 워킹홀리데이를 가면서 1년도 버티지 못하고 돌아오는 건 정말이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결국 몸집만한 캐리어를 질질 끌고 계약해 놓은 맨션으로 향한 지가 지금으로부터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본체류 경험은 내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과연 철학관에서 말한 성공의 기준에 도달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는 돈을 주고도 사지 못할 경험을 했다.
연고도 없는 낯선 땅에 취업해 생활비를 벌고, 완전히 독립하여 혼자 살아가면서 나는 처음으로 무언가에 쫓기지 않게 되었다. 중간고사를 치르면 새로운 과제가, 과제를 제출하면 기말고사가 기다리던 굴레에서 벗어나니 주변이 이렇게 고요해질 수 있구나. 누구도 내게 다음에 처리해야 할 일을 다급하게 안겨주지 않았고, 대신 누구도 내 다음 달 생활비를 충당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를 온전히 내가 질 수 있게 되었고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에 흥미를 느끼는지 알게 되었다.
아, 나도 하면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이 사실을 깨닫는데 이십 삼 년이 걸렸구나.
아르바이트처가 있던 오사카 니시우메다의 백화점에 가면 흰 벽을 따라 검은 선이 어지럽게 그려진 벽화가 하나 있다. 키스해링의 그림처럼 빼곡하게 채워진 벽화 중앙에 네모난 틈, 그 옆에 난 작은 키패드에 번호를 누르면 직원용 로커로 이어진 좁은 통로가 하나 나온다.
어두운 통로를 따라 이리 꺾고 저리 돌아 들어가면 다양한 나라에서 온 직원들이 전통악기를 연주하거나 다과를 먹을 수 있는 작은 휴식공간이 있었고, 나는 그 옆에서 유니폼을 갈아입은 후 다시 통로를 돌고 꺾어 벽화 밖으로 나왔다. 간혹 근무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날이면 벽화 맞은편에 놓여진 의자에 앉아 검고 흰 그림을 하염없이 들여다보았다. 누가 그린지도 모르는 그 그림을 보며 나는 내가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걸 깨달았다.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검고 흰 벽화 앞에서 나라는 존재에 대해 고민하던 날들을. 내 앞에 그려진 분명한 그림처럼 세상은 흑과 백으로 나눌 수 없는 것이었기에. 마찬가지로 흑과 백으로 나눌 수 없던 나의 모호한 마음을 들여다보는데 나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 덕에 꿈을 찾았고 지금은 꿈을 이루는데 시간을 쏟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정도면 나, 행복하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나는 여전히 모호한 사람이고, 한때 그 모호함은 소매 끝에 뭍은 얼룩처럼 스스로를 괴롭혔으나 내 무늬가 얼룩무늬라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 그는 더 이상 내 결함이 아니게 되었다. 가끔은 문지방 위에 서서 방 너머로 들어가야 할지, 방 밖으로 나가야 할지 여전히 갈피가 서지 않고 그러다 주저앉아 울기도 하지만 뭐 어떠랴. 이 또한 나의 사랑스런 모호함인 것을.
문지방 위에 섰다는 건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쪽으로도 나아갈 수 있는 것이었음을. 나는 너무 늦게 알았을 뿐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과거의 기억을 쫓고, 젊고 철 모르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말하지만 나는 흘러가는 대로 살다 죽으려던 열아홉 살보다 예쁜 얼룩을 묻힌 서른셋이 좋다.
만일 내가 과거를 돌아봐야 한다면 그건 언제나 오사카 니시우메다의 검고 흰 벽화 앞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