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0일의 기록
7월 초에 시작한 와장창 거창 시리즈를 미완으로 둔 지 거의 2달이 다 되어가고 있다. 7월 말~8월 초순의 마음은 이런 것이었다. '이제 8월 되고 벗밭 멤버들이랑 거창 가면 거기서 와-거 시리즈를 맺어야겠다'. 거창에 가기 며칠 전이었을까. 코로나 확진자가 상상하지 못했던 숫자로 불어나기 시작했다. 거창을 가야 할까. 갈 수 있을까. 취소해야 할까. 여러 마음과 상황을 고려하며 비상 대책 회의를 열었다. 결국 8월 초의 거창행은 개강을 코앞에 둔 주말로 미루어지게 됐다.
8월 말이라고 해서 확진자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물론 마스크 안에서) 거창으로 향하기로 했다. 토요일에 떠나 오늘 돌아왔다. 7월 초에는 잡초를 베었고, 작년 8월 중순에는 사과 이파리를 땄고, 이번에는 사과를 땄다. 사과농장에 간다고 하면 으레 되묻는 질문. "그럼 사과 따겠네?"에 그렇다 하고 대답할 수 있는 일손 돕기였다. 사실 당장 이번 주에도 시험이 있고, 해야 하는 것들도 있어서 가는 마음이 완전히 편안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막상 도착하니 거창은 역시나 푸르렀고 안전했다.
거창에 도착한 날에는 볕이 따뜻하니 좋았다. 숙소에 발 들이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사과밭으로 향했다. 나무 아래에 서서 사과 따는 법을 속성으로 배웠다. 노란 박스 맨 아래에 스티로폼을 깔고, 사과가 멍들거나 다치지 않게 위로 살짝 올려 가지에서 떼어내면 끝. 너무 작거나 너무 파란 사과는 따면 안 되고, 탄저병에 걸린 사과는 딴 뒤 바닥에 버린다.
탄저는 비를 통해 전염되는 사과의 병이다. 작은 자국이라도 하루가 지나면 금세 크게 번지기 때문에 빨리 골라내 주어야 한다. 탄저 사과를 한 입 베어 먹어본다. 사과를 별로 좋아하지 않음에도 한입 더 먹고 싶어지는 맛이다. 붉게 잘 익은 사과에 탄저 자국 하나 박혔다고 버려야 한다니. 이렇게 잘 익었는데. 난 농부가 아닌데도 '하이고'하는 탄식 소리가 절로 나왔다.
관행 농가에서는 탄저병을 막기 위해 약을 많이 뿌린다고 한다. 약을 뿌리지 않는 대신 사람의 품을 조금 더 더하고, 버려지는 사과에 담기는 저릿한 마음을 더하면 지금 내가 따고 있는 사과 한 알이 되는 거였다. 사과 하나 따고 탄저 사과 두 개 버리며 안타까운 마음에 벗에게 말을 걸었다. 버려지는 게 너무 많다고. 벗은 대답 한다. 유기농 사과를 산다는 건, 탄저 사과도 같이 사는 게 아닌가 하고. 해가 더 지기 전 다음 나무로 건너가 사과를 따야 해 크게 공감하지 못했으나, 속으로 오래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에 사는 소비자가 함께 부담할 수 있는 짐이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가격이 조금 더 비싸고 모양이 고르지 않아도 함께 건강할 수 있는 먹거리를 선택하는 것. 내일의 세상을 같이 책임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게 문득 감사해졌다.
밭 군데군데 놓인 노란 사과 상자를 운송기에 담았다. 혼자 들 땐 버거웠는데 둘이 드니 거뜬했다. 트럭에 사과 상자를 모두 싣고 뒤를 돌아본다. 저 멀리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다. 각기 다른 모양의 구름이 파란 하늘에 겹겹이 드리워져 있었다. 해 질 녘 사과밭은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여섯 시 삼십 분 무렵의 햇살이 더해지니 사과에 노을빛이 감돌았다. 초록 이파리 사이에 맺힌 붉은 열매가 생경했다. 내가 사는 곳에서 보이는 푸르름과는 사뭇 달라 조금은 다른 세상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사과밭에서 움튼 마음은 사과밭에 놓아두고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은 중규형표 로제 떡볶이. 두말할 필요 없이 맛이 좋았다. 나의 경우엔 음식이 3인분만 넘어가도 손에 버퍼링이 걸리고 고장이 나는데, 중규형은 양이 많든 적든 언제나 맛있는 식사를 만들어주신다. 든든하게 떡볶이를 먹고 과자에 와인까지 한 잔 마시고 나니 금세 깊은 밤이 되었다. 내일을 위해 일찍 누웠다. 불을 모두 끄고 벗들과 오늘의 소감을 나눴다. 반년 남짓 온라인으로만 뵙다가 처음으로 만난 분도 있었다. 어색할 법도 한데, 13인치 모니터로 만난 시간에서도 같은 방향을 보고 있어서 그랬는지 어색함이 없었다. 부연 설명 필요 없이 그저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는 이런 드문 관계가 참 귀했다.
다음날에는 사과를 선별하는 작업을 했다. 150그램에서 189그램까지는 소과, 190그램 이상이 되면 대과로 분류됐다. 홍로는 다른 사과에 비해 멍이 잘 들기 때문에 더 조심해 손을 움직였다. 벌레가 갉아먹었지만 열심히 아물어 점박이가 된 사과는 <대견한 사과>로 나뉘어 따로 담겼다. 탄저 사과와 150그램이 되지 않는 작은 사과는 또 다른 상자에 나누어 담았다. 고구마 새참도 먹고 드문드문 농담도 주고받으며 점심이 되기 전 선별 작업을 끝냈다. 밖으로 나와 가만히 멈추어 정면을 본다. 우리가 사과를 옮기는 동안 거세게 내린 비는 구름이 되어 산 중턱에서 어스름 쉬고 있었다.
점심으로는 또다시 중규형표... 비빔국수. 이걸 다 먹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의외로 우리의 위는 대단해서 깔끔하게-까진 아니었지만 바닥이 보일 정도로 거의 다 먹었다. 벗들은 낮잠을 자고, 나는 데크에 앉아 주일 예배를 드렸다. 바로 마주 보이는 산새가 퍽 오롯했다. 4시 무렵에는 갑자기 드라이브를 떠났다. 무주까지 갔다 오는 동안 거창과는 또 다르게 아름다운 길을 만났고, 동굴도 지났다. 저녁으로는 중규형 어머니께서 회를 대접해 주셔서 그것을 맛있게 먹었다. 식사 자리에서 오가는 대화들이 반가웠다. 잃은 줄 몰랐지만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찾은 듯했다. 그래 내가 그리워하던 것은 이런 것이었구나.
이러쿵저러쿵 재미와 사람들의 기대 사이에서 타협해온 나의 삶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중규형은 용기 대신 계획을 갖고 사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을 지금까지 붙잡아보고 있다. 내가 품은 먼 꿈을 가까운 현실로 옮기기 위해선 구체적인 계획이 필요하겠고, 그런 현실 속에서는 꽤 두근거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나의 먼 꿈 중 하나인 <학교 만들기>를 지금 실현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 환경, 자립. 아주 많은 배울 거리들이 떠올랐다. 모든 것이 이도 저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해보았다. 그건 놀이와 쉼.
놀이와 쉼이 있어도 괜찮은, 잠시 숨을 돌릴만한 학교가 있다면 삶이 좀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그럼 우선 일단은 학교 아닌 학교가 되어야 할 것 같다. 학교 안에서 만나는 한정된 집단과 관심사, 학교가 보여주는 똑같은 선택지를 넘어 조금 더 다양한 삶의 방식을 만나는 공간이 된다면 좋겠다.
와장창 거창의 시작에선 노래기와 함께였지만, 지금은 사과 및 손에 잡히는 재미들과 마주하고 있다. 와장창 거창이 갈무리되고 이어질 내일의 삶은 어떤 모양새일까. 이전과 다름없을까, 사과 한 알만큼의 새로운 삶들이 깃들게 되기도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