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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련 Apr 15. 2018

#0. 인생 노잼시기
(feat. 사색하는 백만볼트)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는 것도 꿀잼이었는데 말입니다.


우리 회사 대표가 그랬다.

'너는 다른 사람에 비해 많은 에너지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야'


그래요. 백만볼트 같은 사람이었어요, 제가.



시작은 이렇다.


최근 나는 우울하다. 백만볼트는 무슨, 십만 아니 만볼트를 내는 것도 버겁다. 

그래서 쉬기로 했다. 물론 몇 개월간 준비한 여러 프로젝트들이 세상 빛을 보기 전이기에, 당장 떠날 수 없다.

그래서 정확히 오늘로부터 2주 뒤, 나는 열흘간의 휴일을 갖는다.

휴일이 도피가 되지 않기 위해 모든 여정을 기록하려 한다.





아무리 백만볼트라도, 에너지는 유한하다.

사색하는 과거형 백만볼트


기본적으로 에너지가 많은 사람은 본인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 총량이 얼마인지 잘 모른다. 남들 쓰는 만큼 써도 모자라지 않으니 흥청망청 쓰고 본다. 그러니 일단 저지른다. 약속도 잡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프로젝트를 늘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to-do list를 쓰고는 흡족해한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본인 에너지 총량을 모른다 하지 않았나. 애초에 머리 속에는 100% 완수밖에 없다. 뭐 100%까지는 아니더라도, 도중에 못하겠다 싶으면 다른 일로 에너지를 소비한다. 하면 되니까. 지금까지 늘 됐으니까. 그리고 그게 너무 재밌으니까. 실패해도 다시 할 에너지가 충분히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러니 무방비하다. 에너지가 흘러넘치는 사람이 조절/관리를 했을 리 만무하다. 아니 어느 억만장자가 응 오늘은 1,000만원 썼으니까, 내일은 아껴 써야지 하겠냐고. 그러니 예측할 수 없다. 남들처럼 티라도 나면 덜할텐데 그것도 쉽지 않다. 에너지가 줄어도 남들과 비슷한 수준이니 나도 알고 너도 알게 될 즈음이면 이미 나락이다.


게다가 회복이 어렵다. 작은 바퀴는 조그만 힘으로도 굴러가지만 백만볼트의 바퀴는 유치원생의 꿈보다 더 크다. 굴러갈 때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도, 한번 멈추면 크기보다 더 많은 힘이 필요하다. 리셋 버튼을 한 수십 번은 눌러줘야 재부팅된단 소리다.


여기서 사색하는 백만볼트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 말이 좋아 사색이지, 쓸데없는 생각이 너무 많다. 백만볼트에게 사색이 끼어드는 순간 '아 이제 좀 쉬어야겠다'라기보다 '왜 에너지가 고갈됐을까, 무엇이 문제였을까'라며 에너지를 또 쓰기 때문이다.   





추진력을 잃은 로켓

이대로 부유할 것인가, 지구로 귀환할 것인가.


배터리가 없다며, 빨간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도 알고 너도 아는 그 상태에 이르렀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잘 극복한 것 같은데 이번에는 좀 심각하다. 며칠, 몇 주가 지났는데 달라질 기미가 없다. 흥미도 관심도 열정도 사라졌다. 에너지 고갈이 원인인지도 모르고 엔진을 몇 개 꺼내 썼다. 여행도 가고 머리도 잘랐다. 로켓이 멀리 날기 위해 1단, 2단 엔진을 분리하지 않던가. 추진력을 얻을 수 있는 엔진은 이제 없는데 회복은 너무 먼 곳에 있었다. 


급기야 빨랫감이 되어 양지바른 곳에 걸려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도 아니면 운석이 되어 우주를 유영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쪽이든 120% 성취를 목표로 달리던 백만볼트 마케터에와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귀환 버튼을 누르기로 했다. 나는 지구로 돌아갈 것이다. 





나만을 위한 10일

모든 것들과 거리두기


이왕 길게 쉬는 거면, 계획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냐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많은 조언은 여행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여행이란, 무엇보다 에너지를 많이 쓰는 일이 아닌가. 길치에게 난생처음 보는 길을 가라니. 큰맘 먹고 떠난 제주에서의 일주일도, 결국 책만 한가득 읽고 돌아왔었다. 그래서 여행보다는 그저 10일간,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규칙을 세우기로 했다.


4월 28일부터 5월 7일까지

오로지 나에게 집중한다. 그 외 모든 것들에 거리두기를 시전한다.

 

1. 급한 용건 외 사람들과의 연락을 끊는다. 

2. 건강하게 먹고, 가볍게 즐긴다.

3. 내킬 때마다 가볍게 움직인다.

4. 컨텐츠(영화/책/음악)는 미리 준비한 것들만 챙겨 본다.

5. 나머지 시간은 사색으로 채운다.

  1) 나는 어떤 사람인가

  2) 마케터로서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가

  3) 이 회사에서 내가 풀어야 하는 문제는 무엇인가

  4) 나는 사회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6. 그리고 10일 뒤. 마음의 결정에 따라 실행한다.




부디, 휴가 전 2주간 잘 버틸 수 있기를.

부디, 휴가 후 백만볼트 마케터로 돌아올 수 있기를. 

만약 돌아가지 않는다는 결정에도 내가 내 모습을 사랑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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