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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은주 Apr 18. 2020

제 삶도, 언젠가 빛이 날까요?

영화 <벌새>를 보고

벌새는 몸길이가 5센티미터 남짓인 아주 작은 새다. 이 작은 새는 1초에 90~180번 부지런히 날갯짓을 한다. 

벌새란 이름은 벌처럼 꽃 속의 꿀을 먹으며 살아간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루에도 수천 번, 수만 번 

날갯짓을 해 겨우 하루 몫의 목숨을 이어가며 살아가는 작은 새. 영화 <벌새>는 그렇게 수만 번의 날갯짓

으로 비로소 한 세계를 통과해 나아가는 한 소녀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902호 초인종을 누르는 소녀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안에서 아무도 응답이 없자 소녀는 이내 얼굴이 일

그러지며 쾅쾅 문도 두드려보고, 신경질적으로 초인종을 눌러본다. 여전히 아무런 기척도 없는 집 안. 순간 무

언가를 깨달은 소녀는 한 층 위로 올라가 다시 벨을 누른다. ‘왔어?’ 누군가가 문을 열어주고, 소녀는 아

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집 안으로 들어간다. 카메라는 소녀가 닫고 들어간 현관문을 길게 응시하다 줌아웃

한다. 거기에는 수많은 902호가 있다. 이 소녀, 은희 같은 여자아이들이 살고 있는 엇비슷한 고통의 집이.

은희는 대치동 떡집 막내딸이다. 1994년에도 대치동은 어긋난 신분 상승의 욕망과 온갖 위계가 뒤엉킨 곳이

다. 은희의 아버지는 꼭두새벽 온 가족을 동원해 떡 포장을 하면서도 ‘대치동에 사니까 공부를 잘해야 한

다’며 장남에게 ‘대원외고 나와 서울대 가라’고 당부한다. 적당한 성적, 적당한 외모, 적당한 가정형편인 은희

에게 관심을 기울여주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아빠는 사교댄스를 배우며 한눈을 팔고, 엄마는 새벽부터 

밤까지 상가에서 떡을 파느라 피로를 파스처럼 붙이고 산다. 큰언니는 남자친구와 몰래 은희 방에 들어와 

밤을 새우고 다시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집을 나간다. 은희는 가끔 오빠에게 방에서 매를 맞는다. 은

희에게는 귀 밑에 난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보다 오빠에게 맞는 게 더 아픈 일이지만, 일상적이고 평범한 은

희의 고통은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한다.


그러던 중, 은희가 다니던 한문 학원에 새로운 강사가 온다. 영지라는 이름의 선생님은 첫 시간에 이런 문

장을 쓴다. 


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相識滿天下 知心能機人). 
서로 얼굴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가득하지만 마음까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어느 날 은희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엄마의 뒷모습을 본다. 반가운 마음에 크게 엄마를 불러보지만 아무리 

불러도 엄마는 은희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 낯섦이 은희는 무섭다. 내가 알던 엄마는, 엄마였을까. 엄마의 

역할을 하느라 어떤 사람이었는지 잊은 게 아닐까. 어떤 관계는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상처를 준

다.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마음을 헤아릴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같은 공간에 살지만 아무도 서

로의 진짜 마음을 알지 못한다. 영지 선생은 은희에게 세상을 낯설게 보는 법을 가르친다. 은희는 세상을 

다시 보고, 조금씩 그 세상에 맞선다.


여성 감독과 여성 주연 배우에 의한 여성 서사. <벌새>는 무언가를 잃은지도 모른 채 살아온 수많은 은희들의 

잊힌 기억을 길어올린다. 어른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에 덩달아 억눌린 채 눈치보며 커온 소녀들. 그저 얌전하

게 학교를 다니거나, 최소한 말썽피우지 않는 조용한 여자아이로 자라주기를 바라는 데서 느낀 체념들. 

그러던 중, ‘그 일’이 터진다. 은희는 또다른 소중한 이를 잃는다. 귀 밑의 혹을 떼어내고, 첫 남자친구와 이별

하고, 후배와도 멀어진다. 상실의 시기를 겪으며 은희는 자기를 둘러싼 세상에 균열을 낸다. 원하지도 바

라지도 않은 채 태어날 때부터 속해버린 그 세상을 스스로 뚫고 나온다. 그리고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

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를 묻는다. 은희는 영지 선생에게 편지를 쓴다. “제 삶도, 언젠가 빛이 날까

요?” 그러나 은희는 오래전 이미 답을 들었다. 그 답을 길잡이 삼아 은희는 나아갈 것이다. 상실을 정면으

로 응시하며,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망연한 표정으로 머무르지 않고, 멈추지 않는 날갯짓으로, 조금씩 어른

이 되어가리라.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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